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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사약 받았다는 이야기, 정사에 없다

평창강 따라 걷기 13-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단종은 1457년 10월에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나는 혼란스럽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 《세조실록》 세조3년 10월 21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필자 주: 세조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단종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것이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단종을 호송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작 《세조실록》에는 왕방연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왕방연이 언급된 것은 《숙종실록》 숙종 25년 1월 2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뜰에 들어가 뵐 때에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까닭을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가명을 받는 신하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유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천도(天道)는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성명이 전해 와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관찰사에게 글로 아뢰게 하라."

 

《숙종실록》에도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아는 단종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야사에 기록된 것이며, 실록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번 답사기를 쓰면서 처음 알았다.

 

단종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쓴 조선시대의 야사총서(野史叢書)인 《연려실기술》의 <단종조고사본말>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아보던 하급 관리)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야사에서도 단종은 사약을 마신 것이 아니고 끈으로 목 졸려 죽었다고 되어 있다. 《세조실록》에 단종이 죽자 “예로써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은 거짓이다. 단종의 무덤에 관한 기록은 《중종실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어명을 받은 우승지 신상(申鏛)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 제사 지내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보고에 따르면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가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겠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덧붙여 보고하기를 고을 아전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이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고 하였다.”

 

야사인 《아성잡설》에서는 단종의 장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노산군이 해를 입자, 관에서 명하여 시신을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엄흥도를 지칭)은 생각나지 않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다.”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단종의 시신은 강변에 버려졌는데, 만약 시신을 거두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당시 영월 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한밤중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동을지산으로 올라갔다. 눈보라를 헤치고 산속으로 도망가던 중 노루 한 마리가 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노루가 있던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엄흥도는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고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단종의 시신과 엄흥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관에서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색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숨은 곳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아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단종이 복권되지 않은 시절, 무덤은 봉분도 없었기 때문에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 사람들 가운데 어린아이들도 그 주변에서 놀 때 그 자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인근 백성들은 암암리에 알고 있었고 관에 고하지를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1541년 (중종 11년) 임금의 명으로 영월군수 박충원이 단종의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하였다. 1681년(숙종 7년)에 단종은 서인에서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 1698년(숙종 24년)에 숙종은 단종을 임금으로 복권시키고 단종의 묘에 장릉(莊陵)이라는 능호를 붙였다.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한 지 241년 만의 일이었다.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내려보냈다. 지관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묘에 관한 관습이나 제도)만 고쳤다고 한다.

 

이후 단종에 대한 엄흥도의 높은 충절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가 주어졌고, 죽은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의 벼슬이 내려진다. 공조판서는 오늘날의 건설교통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장릉 경내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엄흥도정려각’이 세워졌다.

 

본래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두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장릉만이 예외로서 한양에서 먼 영월에 자리 잡고 있다. 1733년 영조는 장릉에 표석(능비석)을 세우면서 앞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하고 뒷면에는 ‘1457년에 단종대왕이 영월군에 계셨는데 10월 24일 승하하셨으니 나이 17살이셨다’라고 기록하였다. 단종이 죽음에 이르게 된 내력은 실록에도 능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우리 답사팀은 지난 9월 2일 한반도지형을 답사하고 시간이 남아 장릉을 방문하였다. 장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평지에 있지 않고 산 능선에 있어서 오르느라고 힘이 들었다.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장릉에는 이런 사연들이 숨어 있었다.

 

 

영월 사람들은 죽은 단종의 혼이 태백산으로 들어가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는다. 특히 영월군 하동면과 중동면에서는 단종을 신격화하여 모신다고 한다. 이러한 믿음은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실린 추익한(1383~1457)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추익한은 1434년 한성부윤의 관직을 버리고 영월 상동면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추익한이 어느 날 단종을 알현하고자 영월로 향하던 중에 연하리 계곡에서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가는 단종을 만났다고 한다. 추익한이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추익한은 급히 영월로 뛰어갔으나 이미 단종은 승하한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을 만났던 수라리재로 돌아와 절명하였다고 한다.

 

태백산은 신라 이래 나라에서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산신제를 수행한 곳이다. 태백산의 산신신앙과 단종 숭배가 합쳐져서 설화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평창이 이효석의 고장이라면 영월은 단종의 고장이다. 영월 곳곳에 단종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966년에 영월군 종합개발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단종제 개최를 논의하였다. 박복휘 씨가 위원장이 되어 1967년 제1회 단종제를 시작하였다. 단종제는 왕릉에 제사를 올리는 행사가 중심이 되는데, 날짜는 한식날로 정하여 매년 4월 5일 무렵에 열었다. 제23회까지는 단종제라는 이름을 썼지만 제24회부터는 문화행사를 가미하여 단종문화제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007년부터 단종문화제 날짜를 4월 마지막 금, 토, 일로 바꾸었다.

 

우리는 청령포 소나무 숲에 앉아 내가 간식으로 준비한 군고구마를 먹었다. 우리는 600년 전에 살았던 단종과 세조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권력과 생사(生死)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때 시인마뇽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날 시인마뇽은 아침 일찍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영월역으로 왔다.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제12구간 출발지로 갔다. 거기서부터 자기가 불참한 제12구간과 이날 우리가 걸은 제13구간을 연이어 걸어온 것이다. 대단한 열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열성을 지지해주는 체력이 부러웠다. 시인마뇽이야말로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 남쪽에 왕방연의 시조가 둥그런 돌판에 새겨져 있다. 대부분 관광객은 주차장에 도착하면 바로 매표소로 이동하여 배표를 사고 청령포로 들어갈 것이다. 왕방연 시조비가 있는 솔모정에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차장에 시조비를 하나 더 만들어놓은 것 같다.

 

 

세조는 단종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을 금하였기 때문에 왕방연의 시조는 기록에 남길 수 없고, 구전됐다. 광해군 때에 병조참의를 지내던 김지남이 영월 지방 순시 때 아이들이 이 시조를 노랫가락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아래와 같이 한시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먼 길에

美人難別秋(미인난별추) 고운 님 여의옵고

此心無所着(차심무소착) 내 마음 둘 데 없어

下馬臨川流(하마임천류) 말 내려 냇가에 앉았으니

流川赤如我(류천적여아) 강물도 나와 같아서

鳴咽去不休(명인거부휴) 울며 쉬지 않고 흐르누나

 

주차장 시조비 옆에 1966년 이만진 작사, 한복남 작곡, 심수경이 부른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가 서있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1928년 11월 30일부터 거의 1년 동안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단종애사’를 217회 연재하였다. 이광수는 작가의 말에서 “정사와 야사를 중심으로 작가의 환상을 빼고 사실 그대로 써서 실재 인물을 문학적으로 재현시키기에 애썼으며 다른 소설보다 더 많은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썼다”라고 밝혔다.

 

1956년에 전창근 감독이 ‘단종애사’라는 제목의 흑백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유치진이 각본을 쓰고 황해남이 주연을 맡았는데, 사극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20살이었던 엄앵란이 단종의 왕비로 연기했는데, 단종애사는 엄앵란의 데뷔작이다. 1963년에는 이광수 원작의 단종애사를 이규웅 감독이 천연색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는 이예춘, 허장강, 전계현 등의 배우가 등장한다.

 

 

저녁 4시 45분에 우리는 청령포 주차장에서 시인마뇽을 만나고 답사를 마쳤다. 이날 평창강 따라 걷기 제13구간은 약 8km 거리를 답사하면서 4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