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유교문화박물관에서 2022년 정기기획전 ‘선비들의 출처, 나아감과 물러남’전을 연다. 오늘날 다변화된 사회는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활하는 이상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고, 할 수 없는데 과도하게 하는 것은 월권이거나 불법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거취 표명, 출처(出處)
조선시대 지식인이었던 선비들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자신의 거취를 매우 신중하게 결정했다. 선비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는 것을 출처라고 한다. 출처에서 ‘출’은 세상에 나가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이고, ‘처’는 재야에 있으면서 자신을 수양하며 덕을 쌓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공부가 어떻게 세상을 위하여 쓰여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쓸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세상을 위해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과감히 벼슬길에 나아가 백성들을 도울 방법을 최대한 찾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나라와 백성에게 재앙이 된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고, 세상에 대하여 발언을 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령과 같은 목민관이 된다면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항상 자신의 처사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과연 나아가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항상 고민했다. 율곡 이이가 ‘선비의 큰 절개는 출처에 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이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들은 어쨌든 자신의 거취가 백성들의 안위와 연결되는 경우 항상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입신양명’은 개인의 출세와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입신양명은 나의 몸가짐을 바로 하여 올바른 이름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신중히 하였던 것은 과연 내가 올바른 이름을 남길 수 있는지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목표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고,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선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에서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려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선비의 본분이었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경우 선비들은 이 경세제민의 포부를 가지고 세상에 도를 펼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올바른 도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安民]이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벼슬에 나아가는 사람들의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약 그러한 뜻을 펴지 못할 상황이라면 과감히 물러나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었다. 선비들이 물러난다는 것은 속세를 완전히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물러나 있더라도 주변의 백성들을 도울 방안을 고민하여 실천하고, 학문을 갈고닦으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 올바른 물러남이었다. 학식과 덕망을 가진 사람이 벼슬을 버리거나 물러나 있는 행동 자체가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알림이었다.
주목할만한 자료들
이번 전시에는 선비들의 출처를 보여주는 여러 자료와 관직에 나가는 각종 길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된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관직 진출로는 문과와 무과로 표현되는 과거를 들 수 있다. 과거는 한 번만 치러 합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시험의 예비단계인 강서는 합격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시험을 응시할 수 없었다.
강서시험의 성적과 본시험인 회시의 성적을 합산하여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음서는 고위직의 자제라고 무조건 벼슬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음서도 기본적인 경전 시험을 치러야 하며, 합격해야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음서시험은 취재라고 하는데 취재시험에 합격한 합격증인 음서 백패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다.
또한 과거에 급제했을 때 급제자들에게 내려주는 어사화, 선비들의 항상 옆에 두고 보면서 거취를 고민했던 침병팔잠 병풍 등도 중요한 전시자료이다. ‘침병팔잠(寢屛八箴) 병풍’은 선비가 갖춰야할 여덟가지 덕목을 의미를 담아 침실에 놓는 병풍을 말한다. 특히 ‘침병팔잠(寢屛八箴) 병풍’은 조선후기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낸 이원조가 71살인 1862년에 자신을 수양하고 경계하는 글로 병풍을 만든 것이다. 이 밖에도 산림을 초빙하면서 군주가 특별히 내린 유지와 산림직에 임명되었을 때의 교지들도 전시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거취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비록 세상을 위해 큰 뜻을 품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혼란만 더할 뿐이기 때문이므로 성급한 이상의 추구는 경계할 만하다. 하지만 상황이 위급한 데도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것도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임진왜란과 같은 큰 국난이 닥치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출처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