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하경복(1377~1438)을 통해 세종의 마음을 읽고 있다. 곧 상대가 절실히 걱정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는 세종을 만나게 된다. 하경복과 그 형제가 걱정하는 바[마음]를 세종은 평소에 함께 나눈 것이다. 세종은 참된 신하를 얻기 위해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대목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임금으로서 통상적으로 해야 할 수준을 넘어 마음을 담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행동들을 수행하고 있다.
일찍이 북방의 국경을 방비할 장군으로 점찍은 하경복에 대해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장기간 근무를 시킨다.
∙ 세종 4년 5월 10일 :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4년 윤12월 26일 하경복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보낸다. 이후 여진족과의 교류며 관리를 맡기게 된다.
∙ 세종 5년 12월 11일 : 하경복으로 우군 도총제를 삼는다.
세종 17년 내직으로 들어올 때까지 북방에서 일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세종은 하경복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세종의 편지
세종 6년 11월 29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더 머물기를 바라는 유서를 보내다) 내시 한홍(韓弘)을 보내어 유서(諭書,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들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던 명령서)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주었는데, 이르기를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초에 경이 진(鎭)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하여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나 늙은 어머니를 뵐 겨를도 없었으니, 내 실로 민망히 여겨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경의 어머니를 방문한 것은 이미 들어서 알 것으로 생각한다. 경이 북문(北門)을 수직하면서부터 국경을 방어하는 군정은 날마다 잘되어 나가고, 간사한 도적들이 틈을 타고 나왔으나 여러 번 승전을 보고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자못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경원(慶源) 싸움에 경이 몸을 일으켜 단신으로 뛰어나와 친히 활과 돌로 싸워, 이에 여러 장교가 앞을 다투면서 나가 적을 격파하였으니, 경의 충의에 내가 중요하게 의지하는 바이다. 경이 진(鎭)에 있은 지 거의 두 돌이 되어 가니, 규례로는 당연히 갈려서 돌아와야 할 것이나, 나는 생각건대, 인재가 어렵다는 것을 탄식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니와, 장수의 임무를 어찌 경솔히 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군사는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도 경의 용감한 병략을 무서워하는데 〈어찌 경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장수될 만한 사람을 살펴도 경과 바꿀 만한 사람이 없다. 옛날에 송나라 태조 때에 변방에 주둔한 장수로 이한초(李漢超)ㆍ마인우(馬仁瑀)와 같은 사람은 모두 그 직에 오래 있어, 혹 수십 년이 되었어도 교대하지 아니하였다. 옛사람의 조처도 실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경은 나를 위하여 머물러서 장성(長城, 길게 둘러서 쌓은 성)이 되어, 나의 북쪽을 염려하는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에 편안히 지내라. 유서를 보내는데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 하였다.
세종은 이때의 편지 이전에도 마음을 담아 물질적인 정성도 보냈다.
∙세종 1년 7월 4일 : 동지총제 하경복(河敬復)에게 밭 20결을 하사했다.
∙세종 2년 4월 7일 : 부평부 목금제 안의 좋은 땅을 하경복 등에게 주었다.
∙세종 6년 11월 2일 : 임금이 이르기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나라를 위하여 변방에 진을 치고, 근일에 승전한 공로가 있는데, 그 어미가 멀리 경상도 진주에 있고 또 집이 가난하니,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는 그 생각이 어떠하랴. 임금으로 신하를 부리는데 그들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고, 곧 그 어미에게 비단 각 1필과 쌀 30석을 내렸다.
세종의 편지에 하경복 형제가 답신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경복 형제의 답신
세종 6년 12월 19일 ;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과 지곤남군사 하경리 형제가 사은전-임금의 은혜를 감사하며 글을 올리다)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사은전(謝恩箋)을 올려 이르기를, "갑자기 사신이 와서 전하의 글을 받으니, 혼자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어 감격에 넘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더구나, 분수에 넘쳐 그 은혜를 뼈에 새겨 보답해야겠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이 외람하게 변변치 못한 성품으로 일찍부터 넓으신 은혜를 받게 되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봉사하여 자나 깨나 잊지 않으며, 나라를 위하여 외적을 방어하는데 어찌 감히 어수선하여 어려운 시기에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계책이 알맞지 못하여 중책을 위임한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앉아서 1년 이상의 국고를 소비하면서 겨우 한 번 싸우고 서로 물러서게 되어 바야흐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 터인데, 외람하게도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의 한 몸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모친도 또한 영광에 참여하였으며, 운한(雲漢, 《시경(詩經)》의 편명(篇名)과 같은 보배로운 글을 내리시고 송나라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 몸이 오랫동안 임무를 맡아 성과가 있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자세하고 한결같게 바른길을 잡고 큰 업적을 이루며, 옆으로 훌륭한 인재를 구하여 여러 가지 공적을 모든 벼슬아치에게 베풀고, 국경을 조심하고 튼튼하게 하여 나라의 기초를 영구히 굳건하게 하려는 성대(聖代)를 만나, 신을 가리켜 변방 일을 대강 안다고 하시고 신을 옛사람에게 비유하시니, 신은 감히 전일에 닦은 바를 부지런히 계속하고 평소에 품었던 뜻을 더욱 굳게 하여, 덕과 위엄을 오랑캐에게 선양하여 어진 사람에게 돌아오게 하고, 변방 백성에게 농업을 권장하여 길이 생업을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지곤남군사 하경리(河敬履)가 사은전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신의 어미가 특히 성은을 받잡고 눈물을 턱까지 흘리면서 신에게 이르기를, ‘네 아비 승해(承海)가 태조를 섬기고 태종을 받들어서, 흐뭇한 총애와 은덕을 입어 전토와 노비까지 하사받고, 또 장례 때 쌀과 콩 그리고 종이와 초를 내리셨다. 네 아비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은혜를 받은 것이 대단한데, 또 너의 형제가 아무 재주도 없이 태종을 섬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성은을 입어 영화로운 벼슬과 녹봉을 받았으니, 실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앞으로 경복이 동북방에 나아가 방어하게 할 때, 노첩(老妾)의 음식 공양을 걱정하고 너를 가까운 고을에 임명하여 모자의 정을 갖게 하셨으니, 전하의 과첩(寡妾)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는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또 나의 기한을 염려하여 특히 쌀과 비단을 내리시니, 과첩의 정을 네게 대신하여 주상께 아뢰어라.’라고 하였습니다. 신 경리(敬履)는 생각건대, 형 경복이 왕명을 받고 변방에 나가 국경을 지키는 것은 신하된 사람의 직분인데, 전하께옵서 직분상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상을 주시고 신의 모친에게까지 미쳤으니, 신의 한 집은 여러 번 성은을 입사와 신의 모친만 감격할 뿐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도 또한 지하에서 반드시 감동하여 울 것입니다. 신의 모자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사례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였다.
세종은 생각한다. 하경복의 어머니가 아프다고 한다. 낮에는 북방의 여진족을 성 위에 올라 바라보고, 밤이면 어두운 방에 앉아 뒤에 남아 있는 가족과 나라를 생각할 하경복이 떠오른다. 하경복의 어머니께 쌀과 옷감을 보냈다. 어머니가 고마워할 것이다. 그 기운이 하경복에게도 옮겨가면 좋겠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마워하는 것과 하경복이 고마워할 일 사이에는 거리가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 하경복에게 전달되기에는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어머니께 마른 과일들과 옷감을 편지와 함께 보내드린다. 편지 속 내 마음이 어머니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신하로서 나라를 지키는 의로움을 나의 작은 정성이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전선에서 목숨을 거는 일과 후방에서 쌀을 보내는 일은 그 위험도가 비할 바 아닐 것이다. 세종은 마음속에 이제 되었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정성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세종은 하경복을 끝까지 배려한다.
∙ 세종 18년 5월 13일 : 하경복 등에 얽힌 죄를 과할 것을 윤허하지 않다.
∙ 세종 18년 5월 24일 : 하경복에게 명하여 돌아가 그 모친을 봉양하게 한다.
세종 20년 8월 17일에 경상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죽었다. 62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