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소현세자와 강빈.
개화당이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갑오개혁의 기치를 올리기 250여 년 전, 새로운 조선을 꿈꾼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9년 동안 가난하지 않은 조선, 청나라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는 조선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애썼다. 그러나 그 꿈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이다. 부왕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상 인조의 묵인 아래 독살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강성한 조선을 꿈꿨던 소현세자 내외는 어찌하여 이렇게 허망하게 가야 했을까. 이들이 인조 사후 조선을 통치했다면 조선은 경술국치를 겪지 않아도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들의 죽음은 국운의 융성과 쇠퇴를 가른 뼈아픈 이정표였다.
이 책, 《조선궁중잔혹사》를 쓴 김이리 또한 이런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과 《한국역대 궁중비사》에서 민회빈 강씨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찾을 때마다 그녀의 혜안과 열정에 탄복하며,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비사를 역사장편소설로 절절히 그려냈다.
소설은 강빈을 위주로 흘러간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강빈도 그저 세자빈의 본분에 충실한 평범한 여인이었다. 가례를 올린 지 9년 만에 낳은 귀한 원손 석철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청나라의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이닥친다. 병자호란이었다.
대소신료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강빈과 원손은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했지만, 손쉽게 바다를 건너온 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마저 항복하자 세자 부부는 속절없이 인질이 되어 아우 봉림대군 내외와 청나라로 끌려갔다.
강빈의 진가는 여기서부터 발휘된다. 강빈은 주저앉아 운명을 원망하기만 하는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강단 있고 사리 분별이 정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강빈은 조선관의 안주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청나라 심양에서 하는 인질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아직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한 청은 물자가 매우 필요했고, 조선관에는 지나친 공물 요구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병자호란 때 일부러 고관대작의 가족을 포로로 많이 잡아 온 청나라는 거액의 몸값을 받고 포로를 속환시켜 주었다.
세자 내외는 조선 조정과 청국 사이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지나친 요구를 무마시키고, 조선 조정의 처지를 전하고, 조선인 포로 속환에 최선을 다했다. 세자 내외의 노력이 빛을 발한 덕분인지, 처음에는 조선 세자를 업신여기던 청나라 신료들도 점차 예를 갖춰 세자를 대했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인 포로의 수도 많아졌다.
특히 식솔이 이백 명이 넘는 조선관의 살림을 맡은 강빈은 조선 특산물을 청국 고위 관리들에게 판매하는 묘안을 떠올리고 무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친정에 부탁해 조금씩 특산물을 들여오는 정도였지만, 점차 입소문이 나자 무역의 규모가 제법 커졌다. 강빈의 수완으로 조선관은 재물을 늘리고 청국 조정과의 외교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여력이 없어진 청국이 더는 조선관에 식량을 대줄 수 없다며 자급자족하라고 하자, 강빈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규모 농장을 꾸렸다. 사대부가의 귀한 여식으로, 한 나라의 세자빈으로 농사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녀였지만 청나라 왕후장상 못지않게 대규모 농장을 경영, 식량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세자는 그런 강빈이 항상 고마웠고, 부국강병이라는 꿈 아래 의기투합한 그들은 금슬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를 지켜보는 인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보였다.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겪으며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열등감과 의심이 많아진 그에겐 세자가 자신의 보위를 위협할 정적으로만 보였다.
인조도 처음부터 세자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자와 무척 관계가 좋았고, 인질로 보내면서도 많은 인원을 대동시켜 세자로서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후궁 조 소용의 끊임없는 이간질로 부자관계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마침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가 이제 배후의 위협이 없어졌다고 판단, 세자 부부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소현세자 내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인조의 냉랭한 반응이었다.
특히 세자가 가져온 아담 샬의 ‘천구의’,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발상, 이 모든 것이 거슬렸다. 세자를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만 보던 인조는 마침내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을 낳은 결정을 내린다.
감기와 비슷한 학질에 걸린 세자에게 침을 놓으라 명한 것이다. 인조가 보낸 의관 이형익이 놓은 침을 맞고 세자는 곧 숨을 거뒀다. 온몸이 새까맣게 변하고 몸의 구멍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나와 마치 독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다.
누가 봐도 이형익의 죄가 명백했지만, 인조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고 맏아들의 장례를 의심스러울 만치 간소하게 치렀다. 강빈은 너무나 억울했다. 적국 청나라에서도 아홉 해를 버텼던 강건했던 남편이 고작 학질에 걸려 죽은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부왕 인조가 독살한 것이 분명했다.
분기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강빈을 보고 인조는 진노했다. 이미 예정된 순서였지만, 모호한 죄를 덮어쓴 강빈의 오라버니 두 명이 곤장을 맞고 죽었다. 강빈은 유폐되었다 사가로 내쳐진 후 곧 사약을 받았다. 강빈이 낳은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셋째 경안군만 남기고 첫째 석철과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었다. 멸문지화나 마찬가지였다.
강빈은 숙종 43년(1717), 사약을 받은 지 72년 만에 신원 되어 민회빈 강씨로 봉해졌다. 그의 아버지 강석기를 비롯해 강빈옥사에 관련되었던 사람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이로써 역사에 길이 대역죄인으로 남는 것은 피했다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은 200년 앞서나갈 수 있었던 조선을 뒷걸음치게 만든 너무나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이들의 한이 왕실에 남은 것일까. 그 뒤로 조선왕조에는 후손이 유난히 귀해졌고, 나중에는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소현세자가 살아 인조의 뒤를 이었더라면, 문호를 개방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총명했던 원손 석철이 또 그 뒤를 이었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비극은 널리 알려졌지만,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일어났던 비극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책은 이 비극의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록 약간의 오탈자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조선 왕실에 일어난 원통한 사건의 자초지종이 궁금한 독자라면 순식간에 빠져들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