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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들의 가벼운 발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김현숙, <기도>
[우리문화신문과 함께 하는 시마을 10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  도

 

                                            - 김현숙

 

   가을에는

   한 알의 여문 알곡과 단 과육에서

   천지가 고루 익혀낸

   빛과 향기를 맛보게 하옵소서

   여름날, 밖으로 범람하던 생각도

   안으로 깊이 여울지는

   맑고 고요한 강을 보게 하옵소서

   그러나 한차례 바람이 불면

   세상을 채우던 열매들을 다 내어주고

   더 멀고 외로운 길 떠나는

   행자들의 가벼운 발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침묵으로 믿음이 되는 산과

   비어있음으로 평온한 들판을

   오래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틀 뒤엔 24절기 ‘처서’가 있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어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다. 불볕더위와 무더기비로 몸살을 앓던 올여름을 처분하는 계절인 것이다. 이때쯤 농촌에서는 땡볕에 고추 말리는 풍경이 수채화처럼 곱기도 하다. 또 옥수수 이삭 위를 날아다니는 빠알간 고추잠자리도 가을을 부르는 손짓으로 보이는 때다.

 

한가위 명절을 코앞에 둔 들녘, 노란 벼이삭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지난여름, 시련의 무더위를 용케도 견뎌내고 이제 튼실한 알곡을 선사할 시간이다. 어쩌면 비, 바람, 강렬한 해가 없었다면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벼 이삭을 키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농부의 땀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가을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한여름 코에 땀방울을 맺히면서도 가을을 맞을 간절한 기도를 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여기 김현숙 시인은 그의 시 <기도>에서 “가을에는 / 한 알의 여문 알곡과 단 과육에서 / 천지가 고루 익혀낸 / 빛과 향기를 맛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렇다. 빛과 향기를 맛보게 할 알곡과 과육은 바로 천지가 익혀낸 것이 아니던가?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노래를 이어간다. “더 멀고 외로운 길 떠나는 / 행자들의 가벼운 발소리를 듣게 하옵소서”라고 말이다. 우리도 이제 눈앞의 욕심에 집착하지 말고 행자들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을 떼어도 좋을 가을이니까 말이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