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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안평대군 글씨로 찍은 《상설고문진보대전》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8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 바다로 흘러가 돌아오지 않음을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란 모름지기 마음껏 즐겨야 하나니

莫使金樽空對月 금 술 항아리가 헛되이 달을 대하게 하지 말게나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내 재주 내었으매 반드시 쓰일 데 있으리니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을 흩어 버려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터

烹羔宰牛且爲樂 양 삶고 소 잡아서 즐겨나 보세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한번 마신다면 삼백 잔은 마시리라!

 

 

어떻습니까? 보기만 해도 호방한 기분이 절로 들지요? 당(唐)나라 때 대시인 이백(李白, 701~762)이 남긴 시 가운데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장진주(將進酒)」입니다. “술잔을 치켜드세!”라는 제목의 이 시는 뒷날 조선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지은 「장진주사(將進酒辭)」에도 영향을 주는 등, 동아시아 문인들이 널리 애송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었던 시입니다. 가로 20.2cm, 세로 28cm의 낡은 책, 그 책의 표지를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 시를 시작으로, 오늘 500여 년 전 중국과 한국의 문화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옛 시문의 본보기를 모아 엮다, 《상설고문진보대전》

 

이 책은 《상설고문진보대전》, 줄여서 《고문진보(古文眞寶)》라고 합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시와 명문장을 전집ㆍ후집 각 10권씩으로 묶어 만든 책으로, 송나라 말기의 인물인 황견(黃堅, 태어남과 죽은 때 모름)이 엮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전녹생(田祿生, 1318~1375)이 원(元)나라에서 《고문진보》를 사가지고 와서 자기 나름대로 교정한 뒤 합포(合浦)에서 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원 간섭기에는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고문진보》는 세종 2년인 1420년에 《선본대자제유전해(善本大字諸儒箋解)》라는 이름으로 옥천에서 펴냈고, 문종 원년인 1451년, 《상설고문진보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어 단종 원년 여러 신료에게 내려졌습니다. 그 책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경오자본(庚午字本)입니다.

 

그 뒤로도 《고문진보》는 목판, 활자로 거듭 펴냈는데, 특히 서당에서 아이들이 한문 문장과 시 짓기를 익히기 위한 교과서로 《고문진보》를 애용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살았던 문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이 배울 제 대개 《십구사략(十九史略)》과 《고문진보》를 익히는 것으로 학문에 들어가는 문(門)을 삼았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책에는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히는 이들의 시와 문장이 주로 실려 있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질박한 고문(古文)과는 달리 「어부사(漁父辭)」, 「이소(離騷)」 같이 전국시대 초(楚)나라에서 유행한 문학 장르인 초사(楚辭), 「북산이문(北山移文)」과 「등왕각서(滕王閣序)」같이 4자-6자의 대구(對句)를 맞추어 짓는 화려한 변려문(騈儷文)도 많이 실려 있습니다.

 

비록 중국인의 편저이지만, 고려 말부터 수백 년 넘게 한문 학습의 도구로 쓰이면서 쉽게 읽도록 문장에 토를 단 현토본(懸吐本)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諺解本)이 나올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고문진보》가 전해 내려온 뒤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 년 동안, 한국 지식층의 문예 감각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뜻이니까요.

 

풍류 왕자의 글씨로 만든 금속활자, 경오자(庚午字)

 

《고문진보》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전하는 판본도 많은, 흔한 책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가 살필 이 《상설고문진보대전》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6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책이 임진왜란 이전의 것이고, 금속활자로 찍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더 종요로운 까닭은 이 책을 찍은 활자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글자가 퍽 유려하고 찍힌 상태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이 활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고려 말 등장한 금속활자도 조선 초기에 나라 주도로 크게 개량되었는데, 특히 세종대왕이 활자에 큰 관심을 가져 태종 대의 계미자(癸未字, 1403)를 개선한 경자자(庚子字, 1420)와 갑인자(甲寅字, 1434) 등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이어져 온 금속활자의 계보 속에 자리한 활자가 문종 즉위년인 1450년에 만들어진 경오자입니다. 이 활자의 만듦새가 얼마나 정교했던지, 이로부터 24년 뒤인 성종 5년(147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납니다.

 

“임금이 우부승지 김영견(金永堅, 태어나고 죽은 때 모름)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무슨 주자(鑄字)를 써서 책을 인쇄하는가?’라 하자, 대답하기를, ‘갑인(1434)ㆍ을해(1455) 두 해에 주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쇄로는 경오자보다 좋은 것이 없었는데, 이용(李瑢, 1418~1453)이 쓴 것이라 하여 이미 헐어 없애고, 강희안(姜希顔, 1417~1464)에게 명하여 쓰게 해서 주자를 하였으니, 을해자(乙亥字)가 이것입니다.’라 하였다.”

 

                  - 《성종실록(成宗實錄)》 권49, 성종 5년 11월 22일

 

“인쇄로는 경오자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경오자가 매우 우수한 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경오자는 “헐어 없앴다.”라고 하지요. 왜일까요? 이용의 글씨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용은 누구일까요? 바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입니다.

 

안평대군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그림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꿈속에서 거닐었던 복숭아밭을 당시 조선 화단의 거장(巨匠)이었던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태어나고 죽은 때 모름)에게 그리게 하여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킨 이가 바로 안평대군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은 안견의 작품뿐만 아니라 중국 대가들의 서화 작품을 많이 수집해 갖고 있었고, 시문과 서화, 거문고에 능했던 예술가였습니다. 특히 원나라 서화가인 조맹부(趙孟頫, 1254~1322) 특유의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를 잘 써서, 명(明)의 사신들이 오기만 하면 그의 글씨를 받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안평대군의 글씨로 활자를 만들었으니, 그 인쇄물 또한 아름다웠을 것은 묻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이 책 또한 글자가 선명하고 예쁘지요. 송설체의 특징이 연미지태(姸媚之態) 곧 우아하게 쭉 뻗어나가는 글자 획인데, 여기서도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아름다운 문장을 뽑아 엮은 선집(選集)을 인쇄하는 데 참 잘 어울리는 글씨입니다.

 

                       

하지만 경오자는 바로 그 글씨 때문에 길게 쓰이지 못합니다. 단종 원년인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안평대군의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1390~1453), 황보인(皇甫仁, ?~1453) 등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합니다.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이르지요. 이때 안평대군도 반역의 혐의를 입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교동도(喬桐島)로 옮겨져 거기서 사약을 받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경오자 또한 반역자의 글씨로 만든 활자가 된 것이지요. 그 때문에 세조가 즉위한 뒤인 1455년, 경오자는 녹여져서 새로운 활자의 재료가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새 활자 을해자의 글자를 쓴 강희안은 세조와 안평대군의 이종사촌, 곧 어머니가 자매 사이였습니다. 그의 글씨로 만든 을해자는 임진왜란 직후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쓰입니다. 반면 경오자는 5~6년 남짓 쓰이고 사라졌으니, 그것으로 인쇄한 책 또한 극히 적을 수밖에요.

 

수백 년 세월을 입어 누렇게 바랜 한 권의 《상설고문진보대전》을 이야기하자니, 호쾌한 당나라 시로 시작하여 조선 초기의 정치사로 끝을 맺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낡은 책이라고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지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지은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한 대목이 먼저 떠오릅니다. 딱딱한 사료(史料)나 ‘보물’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보다 문학가의 붓이 이 책 속 유려한 글씨에 담긴 사연을 더 잘 보여 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자께서 세종대왕의 맏아드님이시고 같은 모후(母后) 심씨(沈氏)를 어머니로, 둘째가 후일에 세조대왕이 되실 수양대군이시고, 셋째가 풍채와 문장과 글씨로 일세를 진동한 안평대군이시고 … 안평대군은 소절(小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색을 즐겨하였으나 수양대군과 같이 우락부락하고 왁살스러운 말썽꾼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무에라거나 나는 술이나 마시련다 하는 태도였었다. 그렇지마는 안평대군에게도 숨길 수 없는 영웅의 기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

 

         - 《단종애사》, 고명편(顧命篇)

 

                                                                                       국립중앙박물관(강민경)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