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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사랑 발라드’ 모던포크의 대명사 되다

톰 팩스턴(Tom Paxton) <마지막 남은 것>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35]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들판이 비어간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듬성듬성 누런 늦벼가 성성하더니 이제 밭에 푸른색이라곤 무, 배추밖엔 남지 않았다. 풍요가 황량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에 마음이 소소해져, 마당에 나와 서리 맞은 꽃씨를 받으며 새삼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꽃이 꽃씨를 남기듯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열매를 남긴다.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다양한 열매를 맺는데,

훌륭한 학업으로 후학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열매를 남기는 사람,

불길 같은 예술혼으로 영롱한 열매를 남기는 사람,

성품이 온화하고 사랑이 깊어 향이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 열매는 식물의 열매든 사람의 열매든 지나온 날들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인생의 가을도 깊은 것인가?

초겨울로 접어드는 초로의 길목에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나’라는 잡초는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기고 스러질까?

막상 생각해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소장음반을 내세우자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내용도 더 알찬 이가 여럿일 테고, 음악활동 역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많고 많을 것이다.

글 실력 또한 남에게 견줄 처지가 못 되니 부끄러울 따름인데,

그 순간 무언가 번뜩하고 스친다.

“그래! 이거라면 ‘나의 열매’로 내세워도 되겠다.”

그건 다름 아니라 손길에 닳고 헐은 《테마별 스페인 단어》라는 책이다.

 

 

내가 걷기운동 나갈 때마다 들고 나가는 책인데 2,600여 단어가 실려 있다. 몇 달이면 다 외우겠지 하며 자만이 가득해 시작했지만, 해가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다 못 외고 있다. 한 권 다 외고 나서 다시 첫 장을 펼치면 가물가물한 단어가 한쪽에 몇 개씩은 나온다. 그때마다 저 유명한 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의 권학문*을 떠올리며 교훈을 얻는다.

 

나의 젊은 시절은 자만과 나태에 빠져 치열함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와서 몇십 배 애를 써도 시답지 않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늦어도 빠른 것'이란 말마따나 '시작은 아무리 늦어도 빠른 것'이기에 '마행처 우역거(馬行處 牛亦去)'라는 속담을 마음에 새기며 걷는다. 말이 가는 곳엔 소도 간다는 뜻으로 언제부터인가 나의 좌우명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나의 열매로 내세울 만한 게 또 하나 있는데, 다 헤진 안전화다.

나의 경솔함이 빚은 죄과로 나는 '쪽박 찬 신세‘가 되어 막노동판을 떠돌던 때가 있었다.

힘없고 기술 없고 나이 든 잡부에게 주어지는 일감은 흔히 '3D업종'이라 불리는 일이었다.

남들이 몸에 해롭고 더럽다고, 위험하다고, 힘들다고 안 하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에게 희망의 빛을 준 명구가 있었으니 바로 청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원매의 '막혐해각 천애원 단긍요편 유도시(莫嫌海角 天涯遠 但肯搖鞭 有到時, 세상의 끝이 아무리 멀다고 하여도 채찍질해서 가다 보면 언젠가 다다를 날이 온다)'라는 격언이었다.

나는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 문구를 되뇌며 일어났고 그 어둡고 긴 굴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거지

모래로 만들어진 것이란 걸

눈 깜빡할 사이에 마음은 바뀌지

당신 손안에서

 

작별의 말도 없이 떠나는 거야?

흔적도 없이

당신을 더 사랑할 수도 있는데

매정하군

알다시피 당신은 내 마음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이지

제발 가지 마, 제발

 

당신 없이

아침에 눈을 뜰 때

내 마음속 노래들이 다 죽어가지

알다시피 당신은 내 마음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이지

제발 가지 마, 제발

 

             톰 팩스턴 <마지막 남은 것> 중에서

 

우리나라의 여성듀엣 산이슬이 1974년에 <마지막 남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불러 귀에 익은 <마지막 남은 것(The last thing on my mind)>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작 가수(싱어송라이터)인 톰 팩스턴(Tom Paxton)이 1964년에 불러 모던포크의 상징성을 지니게 된 노래다.

 

캐럴 다음으로 많은 가수가 불렀다는 얘기가 빈말이 아닐 정도로 가수라면 누구나 탐내는 노래로, 포크나 컨트리 계열의 가수가 아닌 가수들도 앞다투어 불렀다.

 

모던포크라는 장르의 이미지는 저항성으로 대변되는데

이 노래만은 ’사랑 발라드‘임에도 모던포크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사랑의 값어치가 모든 것의 상위개념임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권학문 -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불가경)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춘초몽) 아직 연못가에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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