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또다시 가뭄 걱정이다. 개울이 마르고 마당가 도랑물도 말라간다. 물이 마르니 땅이 마르고, 땅이 마르니 작물도 마르고 작물이 마르니 마음마저 말라간다. 그나마 며칠 전 내린 단비 덕분에 작물들이 푸르름을 되찾는 듯했으나 그것도 이삼일 뿐, 다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다. 요즘은 날씨 검색으로 하루를 열고, 잠들 때도 한 번 더 확인한 뒤 하루를 닫는다. 우리 고장은 해마다 이맘때면 가뭄 때문에 속을 썩였던 것 같다. 보이저 우주선이 태양권계면*을 벗어나 성간우주로 나가고, 제임스 웹 망원경이 백몇십억 광년 떨어진 곳의 별들도 들여다보는 세상에 아직도 하늘을 바라보며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좀 의아하기도 하다. 문득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미래에는 1. 꿈을 찍는 영화 2. 냄새가 전달되는 사진과 영화 3. 서로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전화기 4. 필요에 따라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는 기술 이 개발될 것이라는 말씀 말이다. 이 네 가지 신기술 가운데 1과 2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지, 않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감감무소식이고, 3은 실용화하여 우리가 혜택을 아주 잘 누리고 있는 분야다. 나머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삐띠기”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릅니다. 이사 올 때부터 벌써 그렇게 부르더랍니다. 커서 생각해 보니 우리 마을은 참 이사도 많이 오고 많이 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몇 대를 진득하니 눌러사는 집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나루터가 있어 오기도 쉽고 가기도 쉬워 그런지, 언덕배기 강마을이라 논이 없어 그런지 우리 집안을 비롯해 서너 집안만이 4~5대 이어 살 뿐이었습니다. 삐띠기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것 같습니다. “배텃거리”와 “웃배기미” 다해서 스무나믄 집 정도 되는 곳이라 또래가 드물어 서너 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었지요. 삐띠기는 나의 두 번째 색시였습니다. 첫 번째 색시인 언년이도 나보다 세 살 많았지요. 차분하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들리고 몇 달 뒤 언년이 엄마가 딸을 가슴에 묻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삐띠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동갑내기 금복이와 장표가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을에 어린애라곤 우리 둘밖엔 안 남았지요. 나이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삐띠기에겐 소꿉장난은 이미 시시한 놀이였는지도 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때 동방규라는 시인이 살았다지요. 그는 전한(前漢)의 효원황제(孝元皇帝)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궁녀가 흉노족의 우두머리 호한야에게 공물에 끼워져 시집간 것이 못내 아쉬워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었다네요. 왕소군은 하늘의 기러기도 그 미모에 넋이 나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질 정도였대요. 그래서 낙안(落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전해 오지요. 동방규는 그게 어지간히도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칠백 년이나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냈으니까요. 그런데 그 <소군원>이란 시가 천삼백여 년이나 흐른 이십 세기말에 때아니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지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그랬었지요. <소군원>의 한 구절처럼 1980년 신군부 시절, 이 땅의 봄은 그랬답니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로다! 그 봄의 어느 날 나는 경원선 열차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이라는 명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봄이었지요. 그렇게 봄 같지 않은 봄도 처음이었고, 경원선 열차도, 동두천이라는 도시도 처음이었답니다. 망월사역을 지나고 의정부를 지날 때까지는 서울처럼 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