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보리밥이나 잡곡밥은 먹지 않고 쌀밥만 먹었으니 그렇지.” “지적질” 전문가인 아내가 탁배기잔을 내려놓으며 일갈(一喝)했다. 우리는 종종 아내가 빚은 탁주 한 잔과 음악으로 산골살이의 고단함을 달래곤 하는데, 음악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록(레퍼토리)이 뻔하다. 추리고 추리기 때문이다. “판이 천장이나 만장이나 들을 게 없기는 매한가지”라 투덜대니까 아내가 놓칠새라 비수를 꽂은 것이다. 씹던 안주가 목에 걸리는 듯했다. 가슴에서 덜컥 소리가 나고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나? 내가 그렇게 되었나? 혈당을 낮춘답시고 현미밥을 주식으로 삼고 매식을 할 때도 보리밥집을 찾아 뒤지면서도 정작 음악은 “쌀밥”만 골라 들었구나. “이눔아야! 전깃세 생각도 쫌 하그라.” 음악실에는 이미 빈 소줏병 몇이 나뒹굴고 있었고 시각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음악 없이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대폿집에서 마시는 날에도 마지막은 늘 음악실에서 술자리를 마쳤다. 어느 업소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그건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가는데 마다 주인들 인상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피 붙 이 - 김상아 서녘 하늘이 아련히 물 들면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먼 곳에 아내 모르는 깊은 그리움 하나 있습니다 새소리가 처연히 들려오면 아내와 산길을 걷습니다 내겐 들꽃 씨 같은 여문 그리움이 있습니다 콧등이 시려와 아내를 꼬옥 안습니다 가여운 내 업 하나가 찬 바람에 나뒹굽니다 아내가 알지도 모릅니다 내 핏줄 속으로 애달픈 그리움이 흐른다는 걸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설악산 뱃사공 - 김상아 아무 말 못 했습니다 남들이야 하마 비선대부터 기암에 단풍에 탄성이 터져 나오지만 귀면암을 지나 천불동에 이르도록 좋단 소리 한마디 안 했습니다 이제 슬슬 고뱅이에 기름 빠질 때도 되었건만 힘으로야 이 젊은 아내가 나을 수도 있으련만 스틱은 내게 주고 물이며 도시락이며 과일이며 한 짐 짊어지고 앞서 오르는 당신 작대기 삿대로 바윗길을 저어나가는, 내게 한 치의 소홀함도 없는 당신의 뒷모습에 나 헤피 웃지도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가을 절경을 본다지만 나는 영원으로 함께 건너갈 사공을 보았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새벽잠에서 깨어난 현영감의 마음은 지푸라기 헝클어뜨린 것 같았다. 단 한 번 본 사람이 그렇게 또렷하게 꿈에 나온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만증에다 하지정맥류로 고생하는 할멈을 부축해 오줌을 뉘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 껍질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기만 했다.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볼 일이야 없겠지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멈 몰래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며 조반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청소이시더. 박 씨 양반 댁이니껴?” “아,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 당부도 있고 해서 삼우가 지나면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박 씨. 야위어 보여도 단단한 구석이 느껴지던 사람.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러쓰는 작은 손이 맵차 보이던 사람. 얄궂은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매제가 될 뻔했던, 눈꼬리가 유난히 부드러운 사람. 그가 현영감을 찾은 건 두어 달 전 가을 거두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 여기가 월외리가 맞습니까? 아까부터 낯선 이가 집집이 다니며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현영감네 차례까지 온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좀 먹어둬라. 너라도 기운 차려야 한다.” 그는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수염은 한 뼘이나 자라있었고 광대뼈는 쇠무릎 같은 몰골로 고기를 마분지 씹듯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고기 먹는 양(量)을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 그는 한 자리서 돼지갈비 5~6인분 정도는 간식 취급하는 마귀였다. 한 번은 내기당구에서 진 내가 그와 고깃집에 갔다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입을 상식으로 접근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는 주먹 크기도 보통 남성의 두 배나 되는데, 그의 “선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이가 없다는 무용담이 그가 사는 도시에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는 놀랍게도 턱관절을 분리해 그 큰 주먹이 다 들어가는 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마치 자기 머리통의 몇 곱절이나 되는 알을 꾸역꾸역 입안에 집어넣는 뱀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 그가 상추 대여섯 장을 그 큰 손바닥에 포개놓고 고기를 수북이 올려 아귀 같은 입 속으로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내 돈 나가는 처지에서 어찌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 나도 밑지지 않으려고 실성한 듯 먹어 댄 결과, 계산서에는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느새 가을이 다녀간다. 배추 밑동이 도려지고 무가 뽑히고 집집마다 담벼락에 장작더미가 쌓여간다. 개옻나무 밑엔 붉은 양탄자가 깔리고 찔레 덤불 참새소리가 한층 야물어졌다. “빛은 휘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설이 아니다. 갈대 이삭이 일으키는 바람에도 서녘 햇살은 휘어지고 늘어져서 금실그물을 호면 위에 풀어 놓는다. 꽃은 땅에서만 피지 않는다. 처마마다 곶감으로 꿰어져 겨울로 가는 이정표로 피어있다. 내가 어살*에 걸린 물고기처럼 세파에 떼밀리는 동안 이렇게 가을이 다녀가고 있다. 그동안 참 바쁘게 살았다. 집을 짓는 일, 연못과 도랑을 파서 정원을 만들고 꽃밭 가꾸는 일만 해도 허리가 휘어질 지경인데, 비록 녹음방송이라곤 하지만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을 턱 하니 맡았으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평생 해온 일이 방송이라 앞뒤 재지 않고 덥석 달려든 게 나를 조급증으로 몰고 가고 말았다. '바쁘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뜻 말고도 '어렵다'라는 뜻을 지닌 함경도 사투리가 그것이다. 바쁘게 살면 다른 건 몰라도 살림살이의 어려움은 줄어들어야 할 텐데 더 하면 더 했지, 여간해서 나아지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들판이 비어간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듬성듬성 누런 늦벼가 성성하더니 이제 밭에 푸른색이라곤 무, 배추밖엔 남지 않았다. 풍요가 황량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에 마음이 소소해져, 마당에 나와 서리 맞은 꽃씨를 받으며 새삼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꽃이 꽃씨를 남기듯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열매를 남긴다.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다양한 열매를 맺는데, 훌륭한 학업으로 후학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열매를 남기는 사람, 불길 같은 예술혼으로 영롱한 열매를 남기는 사람, 성품이 온화하고 사랑이 깊어 향이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 열매는 식물의 열매든 사람의 열매든 지나온 날들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인생의 가을도 깊은 것인가? 초겨울로 접어드는 초로의 길목에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나’라는 잡초는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기고 스러질까? 막상 생각해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소장음반을 내세우자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내용도 더 알찬 이가 여럿일 테고, 음악활동 역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많고 많을 것이다. 글 실력 또한 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됫박 막걸리 - 김상아 그는 해방촌만 그렸다 등에는 막냇동생, 머리엔 광주리, 손에는 보따리를 든 어머니의 모습이나 남대문 시장에서 고단을 지고 돌아오는 지게꾼 아버지의 남루한 작업복 “신문이요, 석간, 석간신문이요”를 밤늦도록 외치는 신문팔이 형의 목소리를 그렸다 그는 절망을 그리지 않았다 가끔은 변두리에 가서 ‘야매 똥퍼*’를 해도 월세가 밀리고 동생들 기성회비도 밀려도 아버지 제사 한 번 제대로 못 모시고 꼬부라진 어머니 약 한 첩 못 지어드려도 그의 그림엔 어두운 따스함이 숨어 있었다 그의 화실은 삼각지에 있었다 허름하여 세가 싼 곳이지만 가난이 벼슬인 그는 가장 퇴락한 공간을 얻어 테레핀 냄새로 수리를 했다. 유난히 불빛이 많은 밤이었다. 삼각지 로타리를 돌아가는 불빛들은 죄다 이태원 쪽으로, ‘문안에’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교회 성가대들이 찬송가로 얼은 하늘을 깨고 다니는 통금 해제된 그 밤에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라면땅’ 한 봉지와 막걸리 한 되를 받아와 마주 앉았다 “아껴 마셔라. 배갈 잔에 따라라” 배갈 잔이 아니라 소주병 뚜껑에 따랐어도 어차피 모자랄 술이었다 “우린 할 수 있지? 자, 이 수돗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