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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이 신하를 사직시키지만 버리지는 않아

고집이 센 문신 고약해-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0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대왕 아래에는 유독 고집 센 신하가 있었다. 고약해(高若海, 1377년~1443년)는 세종 때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지닌 문관이다.

 

고약해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 문신이었다. 문제는 그 고집을 내세운 주장이 그 시대를 개혁해 가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인데 그 판단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쉽게 내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변혁이라도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백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정책으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연재에 이어 고약해의 주장 보자.

 

라) 양녕 벌주기

 

(고약해 등이 양녕의 죄를 청하다) 병조 참의 고약해가 성난 목소리로 저지하고 나아가서 아뢰기를, "근일에 정부ㆍ육조ㆍ대간(臺諫)이 연달아 장소(章疏)를 올려 양녕의 죄를 청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힘써 따르시어 임금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부도(不道)한 일을 마음대로 행한 죄를 징계하소서." 하였다. 사간 김효정(金孝貞)ㆍ집의 김종서(金宗瑞) 등이 또 계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께서 말씀한바 나라에 맡긴다고 한 것은 특별히 큰일에 대한 것이지 이와 같은 작은 일을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 범한 죄만은 논할 것이지 어찌 미래의 죄를 미리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고약해가 아뢰기를,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모름지기 정부ㆍ육조ㆍ대간의 청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소견(所見)이 비록 밝지 못하지마는 형제간의 일을 어찌 모두 남의 말을 들어 처리하겠는가." 하였다. 약해와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정부ㆍ육조ㆍ대간의 청은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없이 가만히 한참 있다가, ...효정ㆍ종서 등이 굳이 청하기를 15번까지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교훈에 ‘세 번 간(諫)하여도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가버린다.’라고 하였으니, 그대들도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어찌 말이 많은가." 하니, 대간들이 모두 물러가서 사직(辭職)하였다. (《세종실록》 10/1/18)

 

세종은 끝내 신하들의 간언에 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 번 간(諫)하여도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가버린다”라고 답한다. 간하는 사람으로서는 절망이다. 이에 신하들은 사표를 던진다.

 

얼마 뒤 2월에도 고약해는 상소를 올린다.

 

장령 진중성 등이 다시 이제(李禔)의 죄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들의 청이 거의 석 달이 되었는데, 내가 만약 이를 들어줄 것 같으면 어찌 오랫동안 청하도록 기다렸겠는가." 하였다. 병조 참의 고약해(高若海)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대간(臺諫)의 청을 다 따르지 않으신다면 잠깐 작은 일을 행하시어 청을 막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교묘하게 꾸며서 겉으로 간언(諫言)을 따르는 것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10./2/ 20)

 

고약해와 대간 그리고 다른 중신들도 양녕을 벌하라고 하지만 세종은 왕위를 물려준 형님을 어찌 내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권력을 탐하는 세력을 모으는 등의 왕권 투쟁의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는 마당에.

 

또 다른 사건은 고약해의 결정적인 소신이며 찬반의 여지가 있는 ‘수령육기제’ 논의이다.

 

마) 수령육기제

 

세종 이전에는 수령 3기법이라 하여 관리들이 서울에서 1년 반 근무 뒤 지방에서 3년 다시 서울에서 1년 반 식으로 근무했다. 이는 관리들의 너무 잦은 이동으로 행정이 어렵다고 판단한 세종은 서울과 지방에서의 근무를 각기 3년과 6년으로 늘리도록 했다.

 

 

(형조 참판 고약해가 수령6기법을 무례하게 아뢰자, 그 죄를 탄핵당하다) 여러 신하가 겨우 좌정하였는데, 형조 참판 고약해(高若海)가 자리를 피하여 낮은 소리로 ‘소인’이라고 말한 것이 두 번이므로, 전상(殿上)이 조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높은 소리로 말하라." 하니, 약해가 아뢰기를,

 

"소인이 오랫동안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였으므로, 일을 아뢰고자 하였사오나, 하지 못하였나이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해될 것이 없으니 우선 말하라." 하였다. 약해가 아뢰기를,

 

"소인이 충성이 부족하여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옵니다. 전일에 수령의 육기법(六期法)을 혁파하옵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심을 받지 못하였삽고, 또 청하여 또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같은 말할 만한 일을 신이 만약 말하지 아니하오면, 누가 즐겨 전하를 위하여 말하려 하겠습니까. 육기의 법을 세움으로부터 수령으로서 범장(犯贓, 장물죄를 저지름)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또 인신(人臣)이 6년 동안이나 밖에 있어, 조계(朝啓, 아침에 신하들이 편전에서 임금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일)와 상참(常參, 날마다 편전에서 임금께 국무를 아뢰던 일)에 참여하지 못하오면, 신하의 마음에 어찌 억울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감히 망령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령으로서 범장(犯贓)한 자가 누구냐." 하고, 임금의 말이 끝나지 아니하였는데, 약해가 감히 말하여 마지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내 말을 자세히 듣지 아니하고 감히 말하는가. 경은 끝까지 들으라. 수령을 지낸 것이 열두어 고을에 이른 자도 혹 있다. 예전에 신하가 지방에 명을 받으면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죽더라도 두 가지 마음을 먹지 않는 자는, 어찌 다 충신이 아니어서 임금을 잊은 자이겠는가. 다만 그 경중을 가늠할 뿐인 것이다. 경은 겨우 한 고을을 지내고서, 그 싫어함이 이와 같은 것은 어찌 된 것인가."

 

하니, 약해가 대답하기를,

 

"그 범장한 자는 신이 아무아무라고 지적해 진술할 수는 없사옵니다. 지금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장물(贓物)이 이미 나타난 자가 2, 3인이 되옵니다. 육기 안에 어찌 범장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수령으로서 어질지 못한 자는 그 직임에 오래 있게 되면, 백성이 폐해를 받음이 또한 적지 않으옵니다. 대간과 재보(宰輔, 임금을 도와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사람)가 다 좌우에 있사온데, 신이 어찌 감히 한 몸의 사정(私情)을 함부로 주상 앞에 진술하겠나이까. 이제 비단 청을 들어주지 않을 뿐 아니옵고 도리어 신더러 그르다 하시오니, 신은 실로 실망하였나이다."

 

하여, 그 말이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다 알았다." 사람들이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나더러 간(諫)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까 염려된다. 인신은 진실로 마땅히 극간(極諫)하여 반드시 따를 것을 기(期)하다가, 세 번 간(諫)하여 듣지 아니하면 가는 것이 예전의 의리이었다. 내가 어찌 인신의 극간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하니, 돈이 대답하기를, "약해가 평일의 하는 말은 고상하오나, 말이 행실과 다르므로, 사림의 추복(推服)(충심으로 존경하여 복종함)하는 바가 되지 못하옵니다. 전에 강원도와 충청도를 관찰하올 때에 항상 기생을 싣고서 따르게 하면서, 상서하여 기생을 혁파하려 하였사오니, 이 말이 행실과 틀리는 한 가지 일이옵니다.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사온데, 오늘의 약해의 말은 무례함이 많사오므로, 신도 역시 그 죄를 청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효령의 집에 와서 말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아니하게 하라."(《세종실록》 22/3/18)

 

6년이나 밖에 있으면 임금과 멀어진다는 것, 한곳에 오래 머물면 범죄에 빠지기 쉽다는 것, 여러 번 간언을 올렸다는 것, 거기에 또박또박 불경할 정도로 말 대구를 이어간다. 이에 옆에서 김돈은 고약해의 이중성격까지 끄집어내 일러바친다. 거기에 신하들의 고발도 더해 임금은 고약해를 내친다.

 

그러나 다음 해 5월에 다시 불러들였다. “정효전(鄭孝全)을 일성군(日城君)으로, .고약해를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삼았다.” (《세종실록》23/5/12)

 

세종이 신하를 사직시킨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반성의 기회와 일시적 벌을 통해 자숙의 시간을 갖게 한다는 것이지 그 사람을 아주 버리는 일은 아니었다. 인재가 귀한 조선 시대에 필요한 정치 행위였다. (세종실록 23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