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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초상–함부로 기뻐하거나 화내지 마라

옮겨 그린 초상화, 82살 노학자를 실감 나게 담아내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9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두 손을 모은 조선시대 벼슬아치의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허목(許穆, 1595~1682)이라는 분입니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문보(文甫) 또는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입니다. 눈썹이 길게 늘어져서 스스로 ‘미수’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벼슬은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시호(諡號: 죽은 뒤 업적을 추앙하여 붙이는 이름)는 문정(文正)입니다. 그는 당시 학계의 큰 어른이었고 정치인으로서는 남인의 영수(領袖)로서 깊이 추앙받았습니다. 평생 몸가짐이 고결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품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허목의 모습을 담은 이 초상화는 살아 있을 때 그려진 본을 토대로 옮겨 그린 이모본(移模本)입니다.

 

 

 

82살 노학자를 실감 나게 담아낸 조선 후기 초상화의 수작

 

<허목 초상>의 화폭 위쪽에 쓰인 발문에서 보물로 지정된 이 초상화의 제작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1794년(정조 18) 정조는 채제공(蔡濟恭:1720~1799)에게 허목의 초상화 제작을 사림(士林)들과 논의하도록 명합니다. 이에 체재공은 그해 7월 은거당(恩居堂: 숙종이 허목에게 하사한 집)에서 허목의 82살 초상을 모셔다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명기(李命基, 1756~?)에게 옮겨 그리게 했습니다.

 

이 초상화는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인데, 그림 속 허목은 오사모(烏紗帽,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아치가 쓰던, 검은 깁으로 만든 모자)에 흉배가 없는 담홍색 옷을 입고 서대(犀帶: 무소뿔로 꾸민 정1품을 나타내는 띠)를 둘렀습니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해서 그린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을 취하고 있습니다. 눈썹은 ‘미수’라는 호에 걸맞게 늘어질 정도로 길게 묘사했습니다. 위 눈꺼풀은 검은 선을 긋고 아래쪽에 한 번 더 갈색 선을 그어 주름을 표현했으며, 아래 눈꺼풀은 갈색 선을 긋고 속눈썹을 그려 넣었습니다. 눈동자 주위를 어두운 금색으로 칠하고 검은 동자의 바깥 부위를 푸른 선으로 그어 서늘한 눈매를 표현했습니다.

 

흩날리듯 묘사한 수염에서 움직임이 느껴지고, 수염 밑으로는 어두운 적색 입술이 보입니다. 담홍색 옷의 테두리를 분홍색 선으로 잡은 뒤 다시 회색 선으로 덧 했는데, 깡마른 몸매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듯합니다. 이 초상화는 허목이 살아 있을 때 화가가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현재 확실한 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말년의 허목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옮겨 그려진 1794년, 곧 조선 후기는 초상화 분야에서 사실적인 묘사 기법이 절정에 달한 때였습니다. 이 초상화 역시 허목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한 그림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그림으로 표현된 깡마른 몸, 서늘한 눈매, 휘날리는 듯한 수염 등은 원칙을 지킴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허목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희노지계(喜怒之戒)를 실천한 영욕의 삶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느냐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다투었습니다. 결국 1년을 주장한 서인의 의견이 채택되고, 남인이었던 허목은 삼척으로 좌천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66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지내다 2년 뒤에 경기도 연천으로 낙향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삼척으로 좌천되어 실의에 빠져 태만한 생활을 할 법도 하지만, 허목은 향약을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척주지(陟州誌)》를 펴내 삼척의 연원과 실정을 자세히 알렸습니다.

 

당시 삼척에는 큰 파도와 조수가 읍내까지 밀려들어 강이 막히고 범람하는 큰 재앙이 자주 있었는데, 이에 허목은 동해를 예찬하는 신비한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전서(篆書)로 써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웠습니다. 삼척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우자 물난리가 잠잠해지고, 바닷물이 넘치더라도 이 비를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고본 동해비첩(手稿本 東海碑帖)》은 이 ‘척주동해비’의 밑글씨가 된 필사본으로 모두 27면입니다. 허목의 전서는 그가 이룬 높은 학문의 경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서예사로 보아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연천에서 은거하며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쓰던 허목은 숙종 초반 1674년 무렵 서인이 실각하면서 남인이 대거 등용되자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許積, 1610~1680)의 후원을 받습니다. 허적은 허목과 윤휴(尹鑴,1617~1680)를 후원하여 남인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그리하여 허목은 대사헌,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으로 임명되는 등 정계에서 다시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남인이 분열하자, 청남의 입장을 견지했던 허목은 1679년 허적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하지만 상소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다시 연천으로 낙향했습니다. 숙종은 허목에게 연천에 있는 일곱 칸 집을 하사하여 원로대신에 대한 예를 다하였습니다. 허목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하고 그곳에서 조용하게 한 말년을 보냅니다. 그리고 1682년 8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허목의 문집인 《기언(記言)》 권卷23 중편(中篇)에는 「‘계구戒懼, 희노지계喜怒之戒 이십언二十言」’이라는 시가 전하는데, 이는 “망령스러운 기쁨은 치욕스러운 헐뜯음이 따르므로 반드시 공손함[敬]으로 경계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금니(金泥)로 적은 서예 작품이 전하는데 허목이 세상을 뜨던 해에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함부로 기뻐하면 부끄러워할 일이 생길 것이며(妄喜, 恥隨之)

함부로 화내면 욕됨이 뒤따를 것이니(妄怒, 詬隨之)

가벼이 기뻐하거나 성내지 말고 반드시 공손함으로 경계하라.(喜怒者, 恥詬之媒, 愼戒必敬)

 

이 시구는 그의 강직한 일생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매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리에게 <허목 초상>은 엄정한 자세와 표정으로 희노지계(喜怒之戒)의 실천을 웅변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