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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끝까지 예를 다한 신석조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박은, 설순, 신석조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은 많겠지만 그간 다루어 온 주요 인물 이외 몇몇 신료들을 요약ㆍ정리해 본다.

 

박은(朴訔 공민왕 19년 1370~ 세종 4년 1422)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난 지 여섯 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랐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 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이미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하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나라와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요, 노둔한 자질을 밝을 때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4/5/9)

 

· 용서하는 넒은 마음의 소유자

 

태조 6년(1397)에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당신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한 당신과 같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 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양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하여 본국에 배반하였다고 하고 헌부(憲府)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었다. 그때 집정은 생각하기를, "은은 일찍이 양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잘 적발할 것이라." 하고, ‘은을 사헌 시사에 임명하는’ 인사가 있을 것이다. 은이 대(臺)에 오르게 되자, 양이 뜰 아래서 쳐다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은이 반드시 그전 원망을 갚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리(刑吏)가 결안(結案)을 가지고 은에게 나오니, 은이 붓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죄 아닌 것을 두고 사람을 죽는 데 빠지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아니하여, 아무 일 없이 양을 보호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 뒤에 양이 정승(政丞)이 되어 은에게 이르기를, "양은 진실로 소인이었다. 그대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치려고 한 것이 오래였다."라고 하였다.

 

· 끝까지 예로 접대

 

태종 6년(1406)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에서 내시 황엄(黃儼)을 보내서 제주(濟州)의 동불(銅佛)을 구하여, 간 데마다 위세를 부리므로, 여러 도의 관찰사가 위세에 눌려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오직 은이 예(禮)대로 대접하니, 엄도 흉악한 버릇을 거두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으며, 서울에 돌아와서 태상에게 사뢰기를,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 뿐이라." 하였다.

 

· 죄인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중앙으로 불러올려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하고, 태종 8년(1408)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사헌부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때 하윤(河崙)이 좌정승(左政丞)이 되어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재하고, 우정승 이하는 다만 서명할 따름이었다. 은은 일이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윤의 앞에 나아가서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다가, 자기의 의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형조 판서로 임명되고, ... 태종 13년(1413)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서 봉하고, 겨울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였다. 이때 옥사를 판결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형장으로 그 정상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심문하는 형장이 일정한 수가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형장 밑에서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리오." 하고, 곧 임금에게 계하여 심문하는 형장은 한 차례에 30대씩으로 정하여, 일정한 법을 만드니,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 졸기

 

세종 3년(1421) 12월에 병으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자택에서 요양하였는데, 병이 짙어지자 태상이 약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계속하여 내선(內膳)을 내리고, 또 내옹인(內饔人)을 그의 집에 보내어 명하기를, "조석 반찬을 그의 원하는 대로 하여 주되, 내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게 하라." 하고, 태상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다. 은이 태상의 병환이 오래간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의 병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성명하신 임금은 만년을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작고한 나이가 53살이다.(《세종실록》 4/5/9)

 

 

설순(楔循, 미상 ~ 1435년 세종 17년)

 

조선의 학자ㆍ문관이다. 고려 때 귀화한 위구르(Uighur) 사람 손(遜)의 손자, 경수(慶壽)의 아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1420년(세종 2) 교리(校理), 이듬해 좌사경(左司經), 세종 7년 시강관(侍講官)을 거쳐 인동 현감이 됐다. 세종 9년(1427)에 중시(重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으로 《효행록(孝行錄)》을 증수(增修), 세종 13년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수, 세종 16년 이조 우참의가 되어 윤회(尹淮) 등과 함께 ‘통감훈의(通鑑訓義)’를 저술하였고,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박학하고 역사(歷史)에 뛰어났으며,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인명사전, 2002. 1.)

 

 

신석조(辛碩祖 태종 7, 1407 ~세조 5, 1459)

 

조선전기 집현전저작랑, 직제학, 우사간 등을 지낸 문신이며 학자이다. 할아버지는 병마절제사 신유정(辛有定)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신인손(辛仁孫)이다.

 

세종 8년(1426) : 생원시에 으뜸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저작랑에 제수되었으며, 곧바로 권채(權綵)ㆍ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세종 때, 장래가 유망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에 선발되었다. 이후 직제학ㆍ우사간ㆍ부제학 등을 지냈다. 1452년(문종 2)에《세종실록》을 시찬(始撰)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세조 2년(1456) : 공조참판 때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참판ㆍ대사헌ㆍ중추원사ㆍ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59년 한성부윤을 거쳐 개성유수로 있을 때 죽었다.

 

성품이 온순, 근엄하며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이 능하였으며, 《의방유취(醫方類聚)》ㆍ《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는 《연빙당집(淵氷堂集)》이 있다.

 

· 졸기

 

“개성부 유수 신석조(辛碩祖)가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병오년(세종 8년)의 생원시에 장원하여 과거에 올라서, 집현전 저작랑(集賢殿著作郞)에 선발 보직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직제학에 이르렀다가 우사간 대부로 옮겼고, 집현전 부제학에 승진되었으며, 이조 참판ㆍ사헌부 대사헌ㆍ개성부 유수(留守)를 역임하고 졸(卒)하니, 나이 53살이었다.

 

성품이 온후하고 순박하여 근신하였다. 시호를 문희(文僖)라 하였으니, 학문을 널리 닦아 견문이 많은 것이 문(文)이고, 소심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이 희(僖)이다.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다.” (《세조실록》 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