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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신분마저 포기한 사랑, 《채봉감별곡》

《달빛 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 – 채봉감별곡》, 권순긍 글, 휴머니스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5)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풍기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짝지어 줌이라.

은근한 마음으로 사랑의 노래를 보내니

신랑 각시가 되어 신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만생 장필성 근정

 

(p.26)

그대에게 권하노니

선녀를 만나는 꿈은 생각지 말고

힘써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소서.

채봉

 

이런 ‘단호박 거절’을 당한 선비의 운명은?

결론을 말하자면, 잘 풀렸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단,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채봉이 기생이 될 정도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말이다. 우연한 만남, 운명 같은 사랑, 갑작스러운 시련, 재회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사랑 이야기는 무수한 이들이 밤을 새워 읽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요즘같이 로맨스 소설이 넘치는 시대에, 그래봤자 옛날 사랑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을까 싶지만 《채봉감별곡》은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다. 박진감 넘치고, 반전도 있으며, 생각보다 재밌다. 이 재미의 상당 부분은 여주인공의 당찬 성격에서 나온다. 운명에 순응하는 지고지순한 양갓집 규수가 아닌, 기생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옛 정인을 찾는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초 채봉은 평양성에 사는 김 진사의 금지옥엽 무남독녀였다. 김 진사는 평양에서 문벌과 재산이 남부럽지 않은 양반으로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늘그막에 딸 하나를 낳아 이름을 채봉이라 했다. 채봉은 소설의 여주인공이 으레 그러하듯이, 시와 글씨가 빼어나고 용모도 꽃같이 아름다웠다.

 

어느덧 채봉이 혼인할 나이가 되자, 김 진사는 평양에는 채봉에 걸맞은 배필이 없다고 여겨 사윗감을 구하러 한양으로 나섰다. 사윗감만 구해왔으면 좋으련만, 김 진사는 엉뚱하게도 벼슬까지 구하러 허 판서 댁을 기웃거리다 결국 사고를 친다. 과천 현감에 눈이 멀어 금쪽같은 딸 채봉을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내기로 약속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김 진사가 한양에 가 있는 동안 채봉에게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집 담장이 터진 곳으로 우연히 한 선비를 보게 되어 시를 주고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끌린 김채봉과 장필성은 마침내 혼인을 약속하게 된다.

 

(p.15)

어떤 미소년이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데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 가량이요, 의복이 말끔하고 얼굴이 아름다우며 풍채가 수려한지라.

채봉은 첫눈에 마음이 끌리나,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취향을 앞세워 급히 초당으로 들어가 동산으로 난 문을 걸어 잠근다.

 

그 뒤 장필성의 집에서는 채봉의 집에 혼담을 넣어 김 진사 부인의 허락도 받았다. 이제 김 진사가 돌아와 최종 승낙만 하면 되는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소설이 아니지 않는가. 허 판서 댁 소실로 채봉을 들여보내기로 한 김 진사는 채봉의 의견을 묻는다.

 

(p.76)

“아가, 너는 재상의 첩이 좋으냐, 여염집의 부인이 좋으냐? 아비, 어미 있는데 부끄러울 게 뭐냐.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채봉이 예사 여염집 처녀 같았으면 부모의 말이라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을 테지만, 원래 학식도 있을 뿐 아니라 장필성과의 일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는지라. 게다가 부모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은 터라 조금도 서슴지 않고 얼굴을 바로 하고 대답한다.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뒤 되기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단호히 거절했건만, 벼슬에 눈이 먼 김 진사 내외는 재산을 처분하고 채봉을 강제로 가마에 태워 한양에 올라가다가 도적떼를 만나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실 채봉은 도적떼가 마을을 덮치기 전 은밀히 몸을 빼내어 다시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채봉이 도적떼에 끌려갔다고 생각한 김 진사 내외는 통곡한다.

 

그 와중에 허 판서는 일부러 딸을 숨기고 데려오지 않았다고 하여 김 진사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5천 냥을 더 가져와야 풀어주겠다 한다. 차라리 기생이 되었으면 되었지, 허 판서의 첩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채봉은 기생이 되어 5천 냥을 마련한다.

 

아름답고 글 잘하기로 소문난 기생 ‘송이’가 된 채봉은 자신이 장필성에게 주었던 글귀에 짝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이 시는 어떤 시에 답한 것이니, 어떤 시에 이같이 답한 것인가를 알아내는 사람이라야 몸을 허락하겠다’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문제의 답을 아는 이는 장필성 밖에 없었고, 둘은 마침내 만나 그간의 오해를 푼다. 그러나 한 번 기생이 된 이상 쉽게 기적에서 몸을 빼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으니, 새로 부임해 온 평양감사 이보국이 채봉의 사연을 딱하게 여겨 기적에서 빼내고 별당에 거처하며 문서 공무를 돕게 한다.

 

이때 장필성도 어떻게라도 채봉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양반의 체면을 내려놓고 이방이 되어 평양 관가에 드나든다. 그러나 채봉은 별당에 있고 장필성은 관청에만 있으니 서로 속을 끓이다가, 마침내 채봉이 지은 애절한 ‘추풍감별곡’을 보게 된 이보국이 둘을 맺어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선비와 양갓집 규수였던 두 사람.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 둘의 신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심청전》이나 《춘향전》이 소설이 끝날 때쯤 주인공들의 신분이 더 높아져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듯 《채봉감별곡》은 신분이 높았던 두 사람이 사랑을 위해 신분마저 포기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는 아마 이 소설이 사실상 신분제도가 사라진 시대에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채봉감별곡》은 1912년 신구서림에서 《추풍감별곡》으로 출판됐으며, 이 책에 실린 것은 1914년 박문서관에서 발행한 《채봉감별곡》이다.

 

옛사랑을 찾기 위해 기생이 되기를 선택하는 ‘파격’,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당당함’까지 갖춘 김채봉은 지금 봐도 참 매력적이다. 옛날 소설은 지루하고 뻔하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채봉감별곡》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