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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밤, 연못의 달을 보며 황홀경에 빠져

이뭐꼬의 구도 이야기 7 - 금산정사 방문기 - 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젊은 시절에 나는 방황하는 구도자였다. 기독교의 ‘예수원 방문기’에 이어서 또 다른 구도 여행인 불교의 ‘금산정사 방문기’를 연재한다.

 

광복절 전날인 1997년 8월 14일 낮 1시 30분, 나는 불교계 친구인 연담 거사와 함께 수원역에서 광주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두 남자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2박 3일 동안 전남 고흥군 건너 남해에 있는 섬, 거금도로 현정(玄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랫동안 그려 오던 여행이었다. 내가 현정 스님을 최근에 만난 것이 1989년이었으니까 무려 8년이나 기다렸던 여행이었다. 8년 만의 외출. 무슨 소설 제목 같기도 하고, 나는 괜히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현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순전히 인연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인 1987년 어느 날, 나는 이전 직장인 국토개발연구원에서 광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끄럽고 닭장 같은 아파트가 가득한 대도시가 싫었다. 모처럼 서울을 떠나 출장을 가는 김에 하룻밤을 광주 근처의 산사에서 보내고 싶었다.

 

나는 직장의 불교 모임인 국불회(國佛會)의 회장 연담 거사에게 광주 근처 백양사에서 하룻밤 묵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면서 스님을 한 분 소개해 달라고 하였다. 며칠 뒤, 연담 거사가 적어 주는 메모를 들고 승용차를 운전하여 광주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백양사를 찾아갔다. 마침 주지 스님이 출타 중이시고 제2인자 스님이 우리를 맞아 주셨는데, 그 스님이 이번에 만나러 가는 현정 스님이었다.

 

그때 백양사를 목적지로 정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972년 5월 어느 토요일. 그때 나는 학군단 제10기로 임관하여 광주포병학교에서 16주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힘든 훈련도 거의 끝나갈 무렵 외박이 허용되었다. 대부분 친구들은 광주 시내로 외박을 나갔다. 나는 광주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돈키호테 (한 집에 살고 있는 아내가 나에게 붙여 준 별명이다) 기질은 그때도 있었던지 나는 내무반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꼬드겨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백양사를 찾아갔었다.

 

그때만 해도 절이 한가했거나 아니면 친절했었나 보다. 스님은 예약도 없이 찾아간 두 명의 육군 소위에게 요사채 방 하나를 내주셨다. 나는 난생처음 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백양사는 크지는 않아도 매우 아름다운 절이었다. 절 구경을 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자다가 잠이 깨어 방문을 열고 마당에 나가 보았다.

 

산사의 밤 12시 무렵이었으리라. 요사채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때마침 보름달이 머리 위 가까이서 요요하게 비치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연못에 비친 봄꽃들의 자태가 새삼스럽게 아름다웠다. 연못 안에도 달이 있었다. 천지는 고요하고, 절에는 어스름한 안개 비슷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때 온몸을 휘감는 신비한 기운을 느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나를 잊은 듯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그러한 느낌이 아마도 참선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는 무아지경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백양사를 가 보고 싶었다. 이미 연락을 받은 현정 스님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그때는 일행 없이 나 혼자 출장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현정 스님은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이었다. 특히 목소리가 은쟁반에 구슬 구르는 듯 특이했는데 여자가 들으면 매우 매력을 느낄 그러한 음색이었다.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독특한 분이었다. 스님은 종정까지 역임하신 서옹 큰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혼인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스님이 되셨다고 한다. 가족을 버리고 출가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결심이 아닐 텐데, 스님은 불혹의 나이를 넘겨 출가를 단행하셨단다. 이러한 경우를 불교계에서는 늦깎이라고 하는데, 늦게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정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이 늦깎이에 속한다. 효봉 스님은 일제 때 판사로서 사회생활을 했다. 어느 날 자기가 사형 선고를 내려 죽은 죄인이 무죄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번뇌에 번뇌를 거듭하다가 결국 출가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 효봉 스님의 나이가 39살이었다고 한다.

 

내가 찾아갔을 때 현정 스님은 백양사 위쪽에 새로 짓는 운문선사의 건축을 담당하고 계셨다. 나는 저녁 공양 후에 스님과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회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나는 “사람이 죽어서 윤회를 한다는 데, 새로 태어나면서 전생을 기억하는가?”라고 물었는데, 스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4시에 시작하는 새벽 예불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만물이 깨어나기 전 캄캄한 새벽에 법당에서 드리는 종교의식과 그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새벽 예불 분위기는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사람의 마음을 신비하게 조용히 뒤흔드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 이후 나는 누구에게나 불교의 정수를 맛보려면 새벽 예불에 꼭 한번 참석하라고 권유한다.

 

 

아침 공양 뒤 작별 인사를 하자 현정 스님은 누룽지 한 뭉치를 비닐봉지에 넣고, 감잎차를 조그만 종이 상자에 담아 주셨다. 그 뒤에도 나는 광주로 출장을 가면서 두 번 정도 백양사로 찾아가 스님을 만났다. 그 뒤 스님과 나는 마음이 통했나 보다. 우리는 해마다 연하장을 주고받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스님이 어느 산방(山房)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후 거금도의 금산정사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님은 거금도가 아름다운 섬이라며 구경 한번 오라고 해마다 연하장에 썼는데, 나는 한번 가 보아야지, 가 보아야지 하면서도 가지를 못하다가 드디어 이번에 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