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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향약집성방》 펴낸 유효통과 좌익공신 이계전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⑩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졸기를 토대로 유효통과 이계전을 살펴보자.

 

 

유효통(兪孝通, 태어난 때와 죽은 때 모름)

 

세종 9년(1427)에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는데, 문장에 능한 학자이고 의학에 정통한 의학자이다. 집현전 부제학, 병조 참의(參議), 중추원 부사 등을 지냈다.

 

세종 13년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 등과 같이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펴냈다. 문장에도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몇몇 작품이 남아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태종 8년(1408) :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그 뒤에 집현전 수찬(修撰)과 집현전 응교(應敎), 예문관(藝文館) 직제학, 집현전 부제학, 공조 참의(參議), 강원도관찰사, 병조 참의, 중추원 동지사, 중추원 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세종 9년(1427): 문과중시(重試) 을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는데, 문장에 능하고 의학에 정통하였다.

 

세종 13년 :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 등과 같이 《향약채취월령》과 《향약집성방》을 펴낸 학자이며 의학자이다.

 

세종 15년(1433): 의학서 《향약집성방》 펴냄

 

 

세종 17년(1435) :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가 완성되었는데 이 두 책의 집필에 모두 참여하였다.

 

세종 22년(1440) : 경주부윤으로 발령받고도 자신의 본관이 경주이고 노비가 사는 곳이며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로 부임하지 않다가 왕명을 피했다며 국문을 당했다. 이를 두고 앞서 경주부윤들이 부임했다가 잇달아 죽은 것을 보고 미신에 휘둘려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그 결과 직첩을 뺏겼으나, 1년 뒤에 돌려받았다. (《세종실록》세종 23/10/10)

 

세조 1년(1455) : 2등 원종공신(原從功臣, 임금을 따라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에 올랐다.(《세조실록》1/12/27)

 

 

한편 그가 당시에 남긴 시 중 일부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데 대표작으로 「춘일소양강행(春日昭陽江行)」, 「차강릉 동헌운(次江陵東軒韻)」, 「청면금은표(請免金銀表)」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유효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문장과 해학에 능하기로 유명했다. 일찍이 집현전에서 여러 학사와 더불어 시 짓는 공부를 논하였는데, 유효통이 말하길 “옛사람의 시는 삼상(三上)에서 더욱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마상(馬上, 말 위)ㆍ침상(枕上, 잠자리 위)ㆍ측상(廁上, 뒷간)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고 삼중(三中)에 있다”라고 하였다. 주변에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한중(閒中 틈새)ㆍ취중(醉中, 술 취했을 때)ㆍ월중(中, 달이 밝을 때)이다” 하여 여럿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삼중이 과연 삼상보다 낫다”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필원잡기(筆苑雜記)》, 《해동잡록(海東雜錄)》)

 

아들 가운데 유목로(兪牧老)가 정승 황보인(皇甫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당시의 풍속에 장가들 때 돈 많은 사람은 반드시 진귀한 보물을 함에 담아 예물로 보냈다. 많이 보내는 사람은 3, 4개의 함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들도 2개의 함을 예물로 하였다. 황보인이 함을 재촉하여 들여다가 손님 앞에서 열어보니, 모두가 책뿐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나중에 황보인이 사돈인 유효통을 만나, “혼인날 예물함에 왜 책만 넣어 보냈습니까?”하고 물으니, “황금이 상자에 가득 차 있더라도 자식에게 한 권의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란 말이 있으니, 혼인날 함에 어찌하여 책을 예물로 쓰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참고 :《청파극담(靑坡劇談》, 《해동잡록》, 위키실록사전)

 

 

이계전(李季甸, 태종 4년~세조 5년, 1404~1459)

 

할아버지는 이색(李穡)이다. 아버지는 이종선(李種善)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조선 전기 집현전 직제학, 도승지,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세종 9년(1427) : 친시 (임금이 몸소 과거장에 나와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과거)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 학사가 되고, 세종 18년(1436) 왕명으로 김문(金汶) 등과 《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펴냈다.

 

세종 27년(1445) :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을 때 세자(문종)가 사창(社倉, 고을에 환곡을 쌓아 두던 곳집)과 의창(義倉,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나 비상 때 가난한 백성에게 대여하던 기관) 등의 현황을 묻자, “근년의 계속된 가뭄으로 사창과 의창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방출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2, 3년만 계속된다면 국가에 비축곡이 고갈되니, 앞으로는 스스로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백성에게만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 사용이 백성들에게 불편이 크다는 점을 들고, 우리나라에서는 포목을 사용한 지 오래되었고 불편도 없으니 구태여 저화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시행 중이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 관리나 토지 주인이 직접 농사가 잘되지 못한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면 손실에 따라 일정한 세금을 감면하던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계전에 의하면, 답험관의 사사로운 처리로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심해 공법(貢法)을 제정했는데, 이를 계속 시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때 대간들이 한글의 제정ㆍ보급과 불교에 대한 종실ㆍ양반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격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자, 세종이 진노해 대간들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국문을 받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임금의 진노가 심하니 상소를 단념하라고 만류했으나, 의금부에 하옥될 것을 각오하고 대간들의 언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세종 29년(1447) : 동부승지, 세종 32년 좌부승지를 거쳐 3달 뒤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문종 2년(1452)에 《세종실록》 펴냄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단종 1년, 1453)에 계유정난에 참여해 정인지(鄭麟趾) 등과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호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조판서로 재임할 때 수양대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체제(六曹直啓體制)를 부활하자 예조판서였던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더욱 전제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출신의 학자가 중심이 되어 세조 제거 운동을 일으켰으나, 이에 참여하지 않고 세조를 도왔다. 이 공로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되었다.0

 

세조 1년(1455) : 이조판서를 제수받았고, 다음 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어머니가 죽자, 조정에서는 미·두 30석과 종이 100권, 석회 40석과 관곽 등을 보내 극진한 조의를 표하였다.

 

세조 4년 : 세조로부터 세조의 정권 획득 과정에서 보인 협력과 사육신사건에 참여하지 않고 도운 공로에 대해 칭송하는 특별 교서를 받았다.

 

이듬해인 세조 5년(1459) 7월 :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9월에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후대에서 보면 옳고 그른 것을 가르기 어렵지만 당시의 법과 선비로서의 소신에 따라 행동한 문신 이계전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