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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하기에서 우리 도자기를 보다

역사의 중심, 혹은 전면으로 나서려는 기개와 노력이 필요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2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꼼장어와 멸치회, 장어구이 등으로 유명한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의 죽성리라는 곳에 가면 일본식 성(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죽성리 왜성이라 불리는 이 성은 마을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조선ㆍ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돌로 쌓은, 둘레 약 960m, 성벽 높이는 약 4m의 성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중종 때 왜구의 방어를 위해 두모포진(豆毛浦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던 곳인데 왜군들은 이곳에서 두모포 진성 밖 더 너른 쪽에 왜성을 쌓고 그 옆 포구를 통해 조선 각지에서 잡아 온 도공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 언덕받이에는 현재 소름요라는 도자기 가마가 있거니와 그 아래쪽에 무명도공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 속에 끌려간 도공들을 추념하기 위함이다.

 

 

 

납치된 도공들은 죽성리 포구에서부터 규슈 일대로 많이 실려 갔지만, 상당수는 바다 맞은 편에 있는 하기(萩)라는 곳으로 갔다. 당시 이곳의 영주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8개 번(藩)을 이끄는 대장이 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전 일본 최고의 차인(茶人)인 센리큐(千利休)의 제자가 되어 차에 관해 배우는 등 대단한 열성 차 애호가였기에 조선 도공의 유치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기로 끌려간 도공 가운데 이작광(李勺光)과 이경(李敬) 형제를 뽑아 어용(御用) 도자기, 곧 번에서 소요되는 공식 다기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니, 이들은 1604년에 하기 성 아래 동쪽 마을에 가마를 열고 어용(御用)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 년 뒤에는 다른 어용 가마가 생겨나는 등 가마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이곳에서 나온 도자기, 주로 찻사발들은 하기야키(萩燒)라 이름으로 규슈의 아리타야키(有田燒)와 함께 일본 전역으로 퍼지며 명성을 얻었다.

 

나중에 이곳 하기 무사들이 주동이 되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이후 일본 사회는 근대화의 길을 가면서 개인이나 기업이 도자기 산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하기에도 우후죽순으로 가마들이 대거 세워지기 시작해 지금도 하기 일원에는 120여 개의 도자기 가마나 판매점이 성황을 이루는,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마을이 되어있다.

 

 

 

필자는 40년 전 첫 나라 밖 취재 때 마침 이곳을 들려 하기의 가마와 도자기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이런 도자기 문화와 역사를 잘 모를 때였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근무할 때 죽성리 왜성에 가서 현지 역사를 본 뒤에 지난번 하기를 다시 찾아서 보니 이곳 도자기들이 참으로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 도자가의 전통을 가장 잘 지켜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진에서처럼 여기 도자기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높이 숭배했던 이른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다시 보는 듯하지 않은가?

 

그리고 시내의 가마를 방문해서 보니 우리나라의 등요(登窯)가 아직도 남아서 그릇 굽는 데 쓰이고 있었다. 200년이 넘은 것도 있단다. 당시 조선에서 가져온 도공들의 기술과 조선풍의 맛이 아직 400년 넘게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고려찻사발이란 뜻의 코라이차완(高麗茶碗)의 작풍(作風)과 기법을 그대로 써서 이도(井戶), 고비키(粉引), 귀얄문(刷毛目), 웅천(熊川)사발, 인화문 분청(彫三島) 등을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우스갯소리로 하기의 찻사발을 잘 아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우리 장인들이 빚은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할 정도로 하기는 우리 도자문화의 옛 전통을 가장 잘 지켜오는 곳이 된다.

 

 

 

실제로 우리가 방문한 가마에서는 발물레로 그릇을 빚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요(노보리 가마)가 생겨났으며 떡가래처럼 흙을 말아 올리는 수법의 타렴기법(輪積技法)도 이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 하기의 도자문화를 보면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기장과 하기 두 지역의 역사를 다시 보게 된다.​

 

부산 기장지역도 일찍이 도자기문화가 발전했다. 지난 2009년에 기장군 장안읍 상장안 도요지와 명례산업단지 터에서 조선시대 가마터가 발굴됐는데, 상장안 도요지에선 밑바닥에 ‘울산 장흥고’라는 글씨가 새겨진 조선시대 전기 분청사기 접시도 나옴으로써 이곳이 나라에 납품하는 대규모 도자기 생산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왜군들이 이 일대 장인 도공들을 다 잡아가는 바람에 이 지역 도자문화는 초토화되었다가 근년에 경북 문경의 맥을 잇는 장인들이 새로 도자문화를 일으키고 있다.

 

 

 

하기는 그렇게 건너온 도공들이 번주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성공했지만, 규슈의 아리타나 가라츠 등과는 다른 길을 갔다. 곧 큐슈 쪽의 도자기 제조법은 조선 것을 배웠지만 명나라의 도자기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으로써 청화나 채색 등 화려한 그릇을 만들어 멀리 유럽까지 수출하는 큰 무역을 한데 견줘, 하기는 비교적 전통적인 도자기 기법에서 크게 변하지 않아 소박하고 정갈하고 차분한 다기 문화를 일본 내에 전해주고 있다. 그것으로 해서 하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규슈 쪽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번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느끼게 된다.

 

또 하나는 당시 부산 기장이나 울산 쪽은 일본이 마지막까지 점령해 가장 오래 일본의 지배를 받은 곳이어서, 거기에 그렇게 많은 왜성이 만들어질 때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점이다. 그때 끌려간 도공들도, 일본 성주들이 잘 대우해 준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포로이자 노예로 박대를 당하고 외국으로 팔려 가기도 했는데, 결국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이런 역사를 보면 어느 사회, 어느 부문이건 머물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된다. 하기의 도자기가 옛날 전통을 잘 지켜와서 우리에게는 반갑지만 나름대로 점점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고 우리의 도자기문화도 옛날의 형태 그대로를 다시 만들고 있고 애용하는 층도 점점 줄어들어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도자기도 발전하는 현대생활에 맞는 새로운 생활의 도구로 거듭 태어나야 하지만 서양 그릇에 밀려 갈수록 더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발전과 변신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주인공들이 나온 이 하기라는 곳도 일본의 다른 대도시에 밀려 점점 더 작은 마을로 축소되고 있으니,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 근대를 일으킨 요시다 쇼인처럼 도시건, 사람이건, 문화건 과감한 변신으로 역사의 중심, 혹은 전면으로 나서려는 기개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