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3 (토)

  • 맑음동두천 -2.1℃
  • 흐림강릉 4.2℃
  • 맑음서울 1.6℃
  • 구름많음대전 0.1℃
  • 구름조금대구 0.7℃
  • 구름많음울산 5.6℃
  • 구름많음광주 2.9℃
  • 구름많음부산 8.8℃
  • 구름많음고창 -0.5℃
  • 구름많음제주 11.0℃
  • 구름조금강화 2.4℃
  • 구름많음보은 -2.4℃
  • 구름많음금산 -2.3℃
  • 구름많음강진군 2.9℃
  • 구름많음경주시 0.7℃
  • 구름많음거제 5.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사기(詐欺)다

<우리말은 서럽다> 3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한문을 끌어들이지 않았던 시절, 우리 겨레는 땅덩이 위에서도 손꼽힐 만큼 앞선 문화를 일으키며 살았다. 비록 글자가 온전하지 못하여 경험을 쌓고 가르치는 일이 엉성했을지라도, 입말로 위아래 막힘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로 어우러져 살기 좋은 세상을 일구어 이웃한 중국과 일본을 도우며 살았다. 이런 사실이 모두 우리나라 고고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알려진 터라 기껏 지난 삼사십 년 사이에 밝혀졌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로만 보아도, 우리 겨레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대동강 언저리(검은모루, 60만 년 전)와 한탄강 언저리(전곡리, 26~7만 년 전)와 금강 언저리(석장리, 4~5만 년 전)에서 앞선 문화를 일구며 살았다.

 

무엇보다도 구석기 말엽인 일만 삼천 년 전에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맨 먼저 벼농사를 지었다고 알려진 중국 양자강 언저리의 그것보다 삼천 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게다가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꽃을 바치며 장례를 치른 신앙생활의 자취까지 드러나, 구석기 시대에 이미 높은 문화를 누리며 살았던 사실도 밝혀졌다.

 

 

그로부터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도 우리 겨레는 줄기차게 새로운 문명을 앞장서 일구었다.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 제주도 고산리,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 남해안 삼천포 조도 같은 유적에서 나온 유물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중국의 황하 신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하남성의 배리강(裵李崗) 문화나 하북성의 자산(磁山) 문화보다 앞서는 것들이다.

 

거기서도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와 제주도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육천 즈음의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배리강 문화나 자산 문화보다 적어도 이천 년을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요즘 중국에서 동북공정으로 있는 힘을 다해 중국 문명의 뿌리로 싸안으려는 요하 문명은 우리 고조선 신석기 말엽의 중심 문명으로서, 중국의 황하 문명이나 양자강 문명보다 훨씬 이르고 더욱 빛났다.

 

기원전 칠천 년 즈음의 소하서(小河西) 문화를 비롯하여 기원전 육천 년 즈음의 흥륭와(興隆窪) 문화를 거쳐 기원전 사천오백 년 즈음의 홍산(紅山) 문화에 이르는 기나긴 요하강 언저리의 요하 문명은,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옥기(玉器) 시대’라는 문명 단계를 새로 마련해야 할 만큼 남다르고 놀라운 문명이었음이 밝혀졌다.

 

신석기 시대를 이어받고 불을 다스리면서 일으킨 청동기 시대의 삶은 더욱 빛나고 자랑스럽다. 불타고 썩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돌과 쇠붙이만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 겨레의 청동기 시대 삶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유물 가운데 무엇보다도 첫손꼽을 것은 고인돌이다. 땅덩이 위에 널리 흩어져 있는 큰돌 유적에서 절반가량이 우리 겨레의 터전에 두루 널려 있어서, 여기가 청동기 문명의 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 무게는 몇십 톤에서 몇백 톤에 이르는데, 이런 돌을 덮어 무덤을 만들던 주인이라면 한꺼번에 오륙천 명의 젊은이를 부릴 힘을 지닌 사람이라야 한다. 이런 고인돌이 무려 사만 개를 헤아리니 그런 세력가들이 얼마 동안이나 이 땅에서 힘을 뽐내며 살았던 것이겠는가?

 

 

고인돌과 떼놓을 수 없는 유물이 칼과 방울과 거울 같은 청동기들이다. 고조선에서 가장 이른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의 청동기는 중국 황하 언저리에서 가장 이른 이리두(二里頭) 문화의 청동기보다 적어도 삼백 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우리 청동기는 아연을 써서 합금 기술이 빼어났기 때문에, 이름 높은 ‘비파꼴청동칼’을 비롯하여 방울이든 거울이든 중국의 청동기와 견줄 수가 없을 만큼 뛰어났다. 우리가 높은 청동기 문화를 중국으로 건네주었다는 사실은 중국 사람들이 불과 농사의 신으로 우러르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가 우리 겨레라는 사실로도 알 만하다.

 

청동기가 앞섰으니, 철기도 중국을 앞지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 고조선의 철기 문화는 중국의 철기 문화보다 사백 년이나 앞서는 기원전 12세기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이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무덤에서 나온 철기 유물로 밝혀졌다.

 

쇠가 구리보다 흔하고 가공이 쉬워서, 철기는 무기와 농기구 발전에 혁명을 가져왔다. 고조선은 신기술로 만든 철기의 활, 화살, 화살촉, 갑옷 따위를 중국에 수출했으며, 일본에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들 철기 문명과 함께 새로운 가공 기술도 발전하여, 짐승(범, 표범, 곰, 말 따위)의 가죽으로 만든 옷과 이들 짐승의 털로 만든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겨레가 세워서 중원을 오백 년 동안 다스렸던 상(은)나라에서는 오늘날 ‘갑골 문자’라 이르는 글자를 만들어 쓰면서, 황하 언저리를 유프라테스, 나일, 인더스와 더불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로 꼽히게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갑골 문자보다 일천 년 이상 이른 때에 짐승의 뼈에 새겨 쓴 이른바 ‘각골 문자’가 우리 겨레의 터전이었던 중국 산동성 창락현 언저리에서 적잖이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우리의 말을 적으려 만들었던 ‘각골 문자’와 ‘갑골 문자’가 어떻게 한문으로 탈바꿈하여 기원 어름에 고구려로 들어와 백제와 신라를 거치며 우리 겨레의 올가미가 되었을까?

 

상(은)나라의 갑골 문자는 주나라와 춘추ㆍ전국 시대를 지나고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는 일천 년 동안에 금문(金文), 전문(篆文)을 거쳐 한족의 말을 적는 한문으로 탈바꿈하여 예서(隸書), 해서(楷書)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흐름 안에서 전문이 한창이던 진나라 시황제 때에 갑골 문자는 우리 겨레와 함께 커다란 고비를 만났다. 유사 이래 중국 한족이 처음으로 중원을 통일하게 만든 진시황은, 그때까지 대륙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 우리 겨레(동이족)의 힘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자 안간힘을 다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분서갱유’다.

 

 

진시황은 나무판과 대쪽에 갑골 문자로 적은 우리 겨레의 말을 모두 모아 불 지르고[분서], 불에 타지 않는 거북 껍질과 짐승 뼈에 적힌 모든 갑골 문자를 모아 그것을 읽고 쓰는 선비까지 함께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갱유].

 

그리고 그때 이미 한족의 말을 적는 글자로 기울어져 한창 쓰이던 전서(篆書)를 힘써 새롭게 고쳐서 한족의 말을 더욱 온전히 적는 글자로 바꾸는 일에 힘썼다. 그래서 진시황 이전의 전서를 ‘대전(大篆)’이라 하고, 진시황이 새롭게 발전시킨 전서를 ‘소전(小篆)’이라 한다. 진시황이 땅에 파묻은 갑골 문자는 1890년대에 와서야 북경의 어느 한약방 주인에게 용골(龍骨)로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진시황을 이어받은 한나라에 와서 소전은 더욱 한족의 말에 알맞게 가다듬어져서 예서가 되고 해서가 되었는데, 한나라 무제(武帝) 때에 우리 겨레의 역사와 문화는 또 다른 고비를 맞았다. 천하를 온통 한족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무제는 서역과 흉노까지 굴복시킨 다음 힘을 가다듬어 우리 겨레를 요하 동녘으로 밀어내어 고조선이 무너지는 빌미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무제를 따라다니며 꿈을 키운 사마천이 우리 겨레가 중국으로 들어가 이루어 낸 지난날의 문명을 모두 한족의 것으로 싸잡아 넣어서 《사기(史記)》라는 역사책을 써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요하 서녘의 고조선 땅은 말할 나위도 없고, 우리 겨레가 황하 중류까지 들어가 중국 문명을 깨우고 일으킨 모든 일들이 송두리째 중국 한족의 삶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것이 바로 한족이 이루어 낸 여러 ‘동북공정’의 첫 삽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것을 본받아 써 놓은 저들의 갖가지 한문책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이 그대로 끌어와 배우면서 우리 겨레의 삶은 갈수록 굴러떨어지는 길로만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