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신일용 화백이 교양만화 《현대미술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그동안 신 화백은 《라 벨르 에뽀끄》로 유럽인들이 아름다운 시대로 그리워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럽 역사를, 또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로 정말로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역사를 만화로 알기 쉽게 우리에게 보여주었었지요. 그런데 신 화백이 이번에는 미술 이야기를, 그것도 난해하고 어려운 현대미술 이야기를 펴내다니요!!! 책을 읽어보니 이건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책임을 실감합니다. 그것도 만화로 집약하여 그린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뿐입니까? 현대미술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르네상스부터 서양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또 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밑바탕으로 얘기해줘야지 밑도 끝도 없이 현대미술만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책을 보니 신 화백은 완전히 서양미술을 꿰뚫었네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다고 하는데, 신 화백은 한 권의 《현대미술 이야기》를 내기 위해서 그 얼마나 많은 서양미술사 책을 섭렵했을까요!
아! 참! 이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신 화백이 고심하여 풀이한 현대미술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해야겠네요. 그런데 감탄하며 읽기는 읽었지만, 이걸 제가 전달하려니 막막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해한 한도 내에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책을 펼치면 베토벤이 지휘하는 모습부터 나옵니다. 그것도 3쪽의 전면 컷으로요. 아니? 미술 이야기를 하면서 왜 시작부터 음악가를? 신 화백은 베토벤이 현악4중주 16번 마지막 악장 악보 위에 남긴 낙서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Muss es sein?(꼭 그래야만 하는가?) 이 낙서는 베토벤 연구자들에게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는데, 신 화백은 이를 현대미술에 화두로 던진 것입니다. 현대미술! 니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지금부터 신 화백이 풀어가는 그 화두를 따라가 보지요. 그러기 위해서 르네상스부터 시작합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미술이란 라틴어 성경을 읽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성경에 묘사된 장면을 설명하여 신앙심을 갖게 하려는 종교적 목적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니 미술의 아름다움이란 뒷전이었지요.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기에 인간 본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술도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인간 본성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미메시스(MIMESIS)'란 말이 등장합니다. 보이는 대로의 세상을 얼마나 잘 재현해 내느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기법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원근법의 발명이지요. 그러면서 미술은 바로크, 로코코 미술,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흘러가는데, 표현기법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미메시스를 통한 아름다움의 구현입니다.
그러다가 인상파에서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빛이 만들어 내는 찰나적 인상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같은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아침의 빛, 한낮의 빛, 석양의 빛에 따라 그 인상은 다 다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날씨에 따라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윌리엄 터너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그리기 위해 돛대에 자기 몸을 묶고 바다로 나갔고, 클로드 모네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루앙 대성당과 베니스 대운하의 모습을 여러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한편 인상파는 그동안 눈길을 주지 않던 소시민, 농민, 평범한 일상 소재 등에도 따뜻한 시선을 던집니다. 일례로 마네는 그동안 다루지 않던 매춘부 올랭삐아를 그것도 정면을 응시하는 벌거벗은 올랭삐아를 그렸는데, 비평가들은 벌거벗은 매춘부를 그것도 뻔뻔하게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는 매춘부를 그렸다고 흥분하였었지요. 이와 같이 인상주의부터는 엄격한 미메시스의 전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뒤 유럽미술은 자연을 재현한다는 미메시스에서 화폭에 담는 대상에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표현주의로 발전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객관적 미술에서 주관적 미술로 진입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첫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출발점에서의 대표적 화가가 피카소와 마티스입니다. 피카소는 1907년 작품 ‘아비뇽의 여인들’에서 여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여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티스는 1905년 작품 ‘모자를 쓴 여인’에서 인간의 살색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고 역시 자신이 느끼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색채를 썼습니다. 그러니 언뜻 보면 병색이 깃든 여인으로 보이지요.
이후 미술은 모더니즘으로 들어서면서, 입체파, 미래파, 청기사파, 다리파, 다다이즘 등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다양하게 발전합니다. 그러다 보니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미메시스의 굴레에서 벗어나 순수한 미술 그 자체를 추구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인상파 이전의 미술은 미메시스를 얼마나 잘 구현해 내냐는 장인적 기법이 중요시된다면, 표현주의 시대에 와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감성이 더 중요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르네상스 이후 미메시스를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 또는 순수한 미술의 조형적 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있어, 그 중심에는 인간의 이성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이성이 도전을 받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살육과 파괴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합니다. 그동안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 이래 이데아라는 절대 가치 아래 철학이 논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실존주의 철학부터 이게 흔들리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는 이성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가치의 상대성이 주장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술에도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미술로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미술로 들어옵니다. 이를테면 앤디 워홀처럼 대량 소비상품을 작품에 도입하거나, 장 미셀 바스키아의 낙서 같은 그림도 인정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테렌스 고는 자기 똥을 순금으로 도금하여 작품이라고 하고, 카델란은 전시장 벽에 바나나 하나 붙여놓고 작품이라 합니다.
참! 우리가 잘 아는 마르셀 뒤샹의 변기도 얘기해야겠군요. 마르셀 뒤샹은 본격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1917년에 이미 이런 작품을 내놓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지요. 아무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전위적인 해프닝과 퍼포먼스도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등, 참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단지 미술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한 미술 사조의 흐름에 어지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아름다움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이요 의미랍니다. 그저 미술을 잘 모르는 너희들은 그냥 우리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인가? 그렇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는 미술이 미메시스를 떠나 순수한 미술 그 자체까지 들어갔어도,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는 것은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미술에 와서는 아름다움에서는 손을 놓아버리고 작가가 생각하는 개념으로 들어가니까, 작가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작가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거기에는 뭔가 철학이 깃든 것 같기도 한데, 신 화백은 개똥철학 아니냐며 의심하기도 하지요.
신 화백은 이렇게 말합니다. “작품으로 모든 걸 말하던 시대는 끝나고, 작가 자신이 아마츄어스러운 철학으로 주석을 달거나, 비평가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찬사로 사족을 달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작품은 뒤로 숨고, 온갖 한 덩어리의 글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은 뭔가 불편하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를 빼앗기고 그저 작가의 설명에 매달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개념이 중요하지 작품의 미학은 중요하지 않다 보니 작가는 아이디어만 내고 실제 작품 제작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허용됩니다.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등 잘 나가는 현대미술 화가들이 그래서 조수들을 데리고 작업합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아예 공장(Factory)이라고 하였지요.
또한 ‘누구나 이런 개념은 어떨까’, ‘저런 아이디어는 어떨까’ 하다 보니, 기발한 착상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실로 다양하고 나아가 과격한 작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남준의 부인이었던 구보타 시게코는 자기 성기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영국 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대표작은 ’1963년에서 1995년 사이에 나와 잔 모든 인간들‘인데, - 제목부터 좀 뭐하지요? - 텐트 안에 붙여놓은 작은 천 조각들에 자기와 동침한 남자들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아마 18, 9세기 유럽의 미술가들이 이런 작품을 보았으면, 이런 게 미술이냐며 오늘날 미술계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한편 이런 화가들은 철저한 계산 아래에 자기 작품 값어치를 올리기 위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치밀하게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디 워홀은 피카소에 대한 오마쥬라며 줄무늬 옷을 즐겨 입는 이미지 마케팅을 하였고, 이 밖에도 유명인을 동원하는 셀럽마케팅, 작품에 항의를 유발시키는 노이즈마케팅, 그럴듯한 이야기를 유포하는 스토리텔링 마케팅 등 다양한 마케팅 기법이 동원됩니다. 곧 미술은 순수하다는 통념과는 달리 상업주의(커머셜리즘)에 물든 것이지요.
그리고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 작가, 딜러, 경매상 등이 자기들끼리 결탁을 해 고가 전략을 유지합니다. 데미안 허스트가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넣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유명한 작품 있지 않습니까? 보석을 박아 넣었으니, 제조원가만 1,200만 파운드라는데, 이 작품은 5,000만 파운드(약 830억 원)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 흘러나온 정보에 따르면, 여러 명의 투자자가 연합체(콘소시엄)를 구성하여 산 것인데, 그 연합체에 허스트가, 그것도 상당한 지분으로 참여하였답니다.
책의 마지막에는 베토벤이 다시 등장하여 또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Muss es sein?(꼭 그래야 돼?)” 현대미술을 열공한 신 화백은 머리에 계속 이 의문이 떠나지 않았기에, 책의 처음과 끝에 베토벤을 등장시켜 이 말을 하게 한 것이지요. 저야 현대미술을 잘 모르니 그동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야만 하나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저 역시 “꼭 그래야 돼?”라는 말을 뇌까리게 되네요.
그동안 신 화백의 만화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리가 끄덕여졌기에, 독후감을 쓴답시며 떠들어 보았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르네상스 이후 인상파 이전까지 서양미술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자연을 미메시스하는 것입니다. 인상파도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그 순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와서는 작가들이 아름다움을 제각기 주관적으로 표현하니, 제3자가 이해하려면 힘이 좀 들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들어와서는 미술에 있어 아름다움은 젖혀버리고 작가가 생각하는 어떤 개념, 좋게 말하면 철학을 미술로써 나타내니, 작가의 설명이 없으면 이해가 힘듭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미술은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의 세계로, 주관의 세계에서 다시 개념의 세계로 흘러왔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오히려 제 글이 더 혼란스럽게만 한 것 같군요.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시 장황한 글을 한 컷의 만화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신 화백의 만화를 보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현대미술이 어렵고 마음에 잘 와닿지 않는다는 분들에게 신일용의 교양만화 《현대미술 이야기》를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