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박 진사는 집에 붙일 이름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고민을 계속하던 어느 날, 박 진사는 고려시대 마지막 충신이었던
조상님 박문수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에 다녀왔단다.
박진사는 사당에 걸려 있는 시를 읊조리다가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옳지! 우리 집 이름을 박문수 할아버지께서 쓰신 이 시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어야겠다.
꿈과 마음을 담은 집, 몽심재로다!”
호랑이 머리를 닮아 호두산으로 불린 산,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죽산 박씨 문중에 박동식이라는 큰 부자가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박 진사라고 불렀다. 박 진사가 꿈과 마음을 담아 오래도록 살 집을 지으니, 그것이 남원에 있는 ‘몽심재’다. 몽심재는 조선 후기에 지어져 지금도 전라북도 대표 양반집으로 남아있다. 알면 알수록 가족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스며있고,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이름나 영호남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김양오가 쓴 책,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는 몽심재의 구석구석을 따뜻한 색연필 그림과 함께 보여준다. 글쓴이 김양오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아동 문학과 글쓰기를 공부하고 25년 만에 역사 동화 작가의 길에 들어섰고, 10년 전 몽심재와 첫 인연을 맺은 뒤 지금은 몽심재가 있는 마을에서 문화재 활용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몽심재와 인연이 깊다.
책에 담긴 몽심재의 모습은 단순한 양반의 집, 그 이상이다. 집을 지은 박동식의 높은 이상과 너른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따스하다. 진정한 양반의 품격, 인간에 대한 배려, 만물에 대한 존중이 곳곳에 묻어난다. 낮게 낸 굴뚝에서도, 대문 앞에 놓인 바위에서도.
하루는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더니 하늘이 맑게 갰어.
일꾼들이 방에 구들장을 깔고 있었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 진사가 말했어.
“여보게, 담벼락 아래쪽에 굴뚝을 만들 수는 없는가?”
“아이고 나리, 굴뚝을 담벼락 아래에 뚫어버리면 연기가 마당으로 퍼져서 좋지 않습니다.”
“우리야 밥을 굶지 않지만, 혹시 저 멀리서 밥 짓는 연기를 보며 배고파할 백성이 있을까 봐 그러네.”
고택을 다니다 보면 연기가 아래로 낮게 퍼지도록 굴뚝을 아래쪽에 낸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몽심재도 예외가 아니다. 배고픈 사람이 연기가 나오는 굴뚝을 보고 괜스레 마음이 신산해질까 배려하는 마음, 이런 부분이 바로 고택의 백미다. 하인을 밟고 말에 타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하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별도로 하마비를 세운 것도 인상적이다.
솟을대문이 세워지자, 박 진사는 힘센 하인 한 명을 불렀어.
“여봐라, 여기에 크고 넓적한 바윗돌 하나만 가져다 놓아라.”
“대문 앞에 바윗돌을요?”
“말에 오르내릴 때 밟을 바위니라.”
하인은 감동해서 박 진사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어.
다른 집 양반들은 말을 탈 때 하인의 등을 밟고 오르내렸거든.
문간방에서 지내는 하인들은 자다가도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 뛰어나와야 했단다.
그런데 박진사는 하인도 자기와 똑같이 귀한 사람으로 여긴 거야.
이렇듯 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몽심재에 새겨진 글귀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문 앞 복바위에 새겨진 ‘미타기적’은 몽심재를 지은 지 어언 2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며칠 뒤, 박 진사는 대문 앞 복바위에 주일암이라는 이름을 짓고 글귀를 새겼어.
미타기적(靡他基適),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사람들을 모두 어여삐 여겨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박 진사는 하인들, 가난한 이웃, 오고 가는 손님 모두 똑같이 어여삐 여기며 나누고 배려한 사람이었어.
그 밖에도 하인들의 방 앞에 넓은 마루와 지붕, 난간을 만들어 ‘요요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정자는 양반들만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일해주는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직원 복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몽심재를 마을 사람들도 귀하게 여겼다. 몽심재는 동학농민운동과 한국전쟁이 남원을 휩쓸 때도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지킨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몽심재는 1984년 유형문화재가 되었고, 2003년 원불교에 기부되어 주요 성지가 되었으며 박장식 종사를 포함해 다섯 명의 종사를 배출했고, 마을 전체에서도 56명의 원불교 성직자가 나왔다.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면면히 흘러서인지, 호음실 마을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계성, 구한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다가 붙잡혀 순국한 박주현,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박정식 등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렇듯 홍익인간과 선비정신, 나눔정신이 가득 담긴 몽심재가 다른 고택과 견주어 다소 덜 알려진 것 같아 아쉽다. 몽심재에 애정을 가지고 책을 통해 소개해 준 지은이의 노고가 고맙다.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꿈과 마음이 담긴 참 어여쁜 집, 몽심재. 날씨가 따뜻해지면 남원여행을 하며 몽심재에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