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우리의 만남은 어머니 배속에서 세상 밖으로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된다. 맨 처음, 태어남과 동시에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와의 만남이라 하겠고, 곧이어 아버지와 만남 그리고 같은 날 태어난 친구들 그리고 친족 등등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났다는 것이 더없이 거룩한 일이며,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 다양한 존재들과 만나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 때문에 탄생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축복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탄생의 성스러움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해당하는 축복이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 어느 것 하나 차별 없이 모두 다 고귀한 것이며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생명 존엄의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의미 부여한다는 것은 모순적 해석일 수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은유를 써서 사람의 권위를 높이 치켜세우고 있다. 게다가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1억 겁 선행을 해야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비유를 들어 얘기하기도 한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은 「망망대해에 구멍 한 개가 뚫린 널빤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수심이 깊은 바닷속에 사는 눈먼 거북이가 100년에 한 번 물 위로 올라와 고개를 내민다고 한다. 그 순간 물 밖으로 내민 거북의 머리가, 떠다니는 널빤지 구멍으로 쑥 들어가는 확률」을 말한다.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왜 굳이 다른 생명들을 제쳐두고 사람만 어렵게 태어난다고 강조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람으로 어렵게, 귀하게 태어난 만큼 사람답게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잘 사는 것이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잘 사는 것이 혼자 잘 먹고, 부와 권세를 마음껏 누리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산다는 것을 말할까? 그것은 돈키호테처럼 과대망상일 수 있다. 사실 잘 사는 것이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고 본다.
그 첫째는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살든지 무관한 일이지만, 서로 협력하고 공유하고 살아야 할 공동체의 운명이라면 당연히 ‘다 함께 잘 살아야 한다’라는 해야 맞다. 그다음으로는, 세상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형성된 집합체 속에서 신뢰와 믿음으로 원활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적 생활방식으로 자기의 꿈과 값어치를 향상해 나가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 할 것이다.
이 밖에 기본적으로 윤리도덕과 생활방식 등에 대한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해서도 모름지기 대의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한도 내에서 열심히 자기 뜻한 바 목적을 지향해 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잘 사는 대에는 물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데 있다고 본다. 반대로 어려운 것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과대한 욕심으로 추함을 들어내고, 비난과 저주와 파멸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갈 때 결코 잘 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았듯, 잘 살고 못 산다는 평가의 기준은 다름이 아닌 집단 사회에서 비교와 분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일 게고, 때로는 서로 간의 경쟁에서 오는 이기적 생활 비교에서 감별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삶의 바탕이 되는 만남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다. 만남이란 본인의 선택에 따라 맺어지는 때도 있지만, 운명이나 숙명적 논리가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만남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떤 삶의 공간 속에서 자연적으로 엮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만남의 형태를 보면, 어려서 마을 친구로부터 사회 친구, 선후배, 직장 동료 상사, 동기 등 길을 가다, 쇼핑하다, 여행하다, 어디서나 자유롭게 인연이 되어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 중에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척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수없는 만남 가운데 귀인(貴人)도 만나고 비인간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내 마음에 쏙 드는 귀인만 골라서 만나기란 무리수일 것이다. 게다가 언제까지 변함없이 나만을 위해주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만 가려서 만난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보다 가까운 사이라도 그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일이다. 상대가 변심하지 않더라도 내가 싫어 변심할 수도 있다. 네 마음 나도 모르고 내 마음 너도 모르는 가운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처럼 언제 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립과 분쟁과 분열과 결별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보는 정치세계에서는 그들 간에 이르기를 “아군도 적도 없다”라고 한다. 친근하다고 하면서도 자기 이권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거나 야욕에 빠져 본질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나도 자칫 그 가운데 한 사람일 수 있다. 내가 정치인이 아니면서 그들의 정치 바람에 휘말려 주관 없이 그 무리들과 편승하여 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대립과 배신과 결별, 위선자가 되고 만다.
그러면서 상대에게 양보를 원하고, 배려를 원하고, 이해를 바라고, 함께 잘살아 보자고 하겠는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그런 다음 귀인을 찾고 좋은 만남을 기대해야 할 것 같다.
여러 만남 가운데서도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는 ‘부부’의 예를 들어보자. 부부 인연은 “전생에 너무나도 다정한 오누이였다고도 하고, 원수였다”라고도 한다. 왜냐면 한결같은 사랑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손을 놓지 못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눈만 뜨면 지지고 볶고 싸우는 부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의견 대립으로 끝내 헤어져 원수가 되는 부부들을 종종 보고 산다.
그 밖에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서로 원수처럼 등 돌리고 헤어지는 일이 많은데 이를 두고 인생팔고(人生八苦) 중 원증회고(怨憎會苦 :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남의 괴로움)라고 했다. 게다가 외진 길에서 일면식도 없는 괴한을 만나서 이유 없이 살상당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고 보겠다.
이처럼 만남은 우리 삶에 있어서 생명수처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두 얼굴을 하고 있기에 만남의 법칙에 대한 윤리와 도덕, 정의를 명확히 하여 근절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본다.
우리의 삶은 만남이란 거대한 공간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서로를 보호하고 권익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갖가지 법률이 정해지고 평화롭고 선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사회라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상상해 본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선을 추구하고 선한 사람을 찾으면서도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무감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마냥 살기 좋은 천국과 평화를 운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구 한편에는 오늘도 총탄과 포화 속에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르는 불투명한 세상을 일러 불가(佛家)에서는 ‘미망의 세계’라고도 하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세계)’라고도 한다.
사바세계는 고통의 세계를 말하는데 고통이란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욕구이긴 하지만, 지나치고 통제하지 못할 때는 독이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욕망 속에서 반목과 대립, 시기와 질투, 모함과 살상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불필요한 욕망은 자칫 필요 이상을 바라는 것이고, 남보다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이는 상대성으로 만남 속에서 끝없는 욕망이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남의 것을 탐닉하려는 마음에서 발생한다. 그러한 욕망과 탐닉이 내 마음에 있고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와 만남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도 날이 밝기 무섭게 만남이 시작된다. 창밖 솔밭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와 재잘거리고 있다. 혹한 추위에도 푸른 기운을 잃지 않고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이 팔을 벌려 나에게로 닦아온다. 출근길 가쁜 숨소리와 뽀얀 입김이 차디찬 허공에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유루(有漏 : 번뇌가 있음을 뜻하는 말)의 흔적은 잠시 뒤 사라진다. 세상 모든 것이 이처럼 잠시 머무르다 사라진다.
조금 있으면 집배원이 반가운 소식을 안고 찾아올 것이다. 수도 검침원도 올 것이다. 법당에는 띄엄띄엄 낭랑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도 이렇게 만남이 시작되었다가 해가 지면 흔적 없이 사라져 간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만남이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만남이다. 어떤 만남이든 오래 잡아 두려는 수고로움도 욕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