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任賢使能(임현사능) :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일 시키다.(《세종실록》 14/4/28)
... 이것은 대체로 엎드려 〈성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성(神聖)하신 우리 임금께서는 문(文)도 마땅하게 하시고 무(武)도 마땅하게 하시는 나라의 큰 법과 기율을 세우시어 태평성대(泰平盛代)의 기초를 더할 수 없이 높였으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8) 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
급제한 문과 김길통, 무과 조석강 등이 사은의 전문을 올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대략 세종 11년부터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등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세종실록》 11/8/24) 나오고, 14년경부터는 안정된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 그리고 30년에는 융평(隆平, 갈등 없이평온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원문 기록 건수 (세종/전체). 균평(均平) 6/98, 승평(昇平) 90/1227, 태평(太平) 100여/375, 풍평(豊平) 5/7, 융평(隆平) 21/69, 치평(治平)은 23여/435 등이다. (기타 측우기와 관련한 수평(水平)이 1건 있다. )
‘임현사능’의 다른 예가 있다.
(문무과에서 은혜에 감사하는 글을 올리다) 명(明)하시며 선(善)하시고, 성(聖)하시며 신(神)하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任用)하시매, 화친하고 광명한 치화(治化)가 크게 드러났고, 학궁(學宮<성균관))에 몸소 나오시어 재예를 시험하시고 문무의 인재를 거두시니... (《세종실록》 16/3/22)
또 다른 예가 있다. 세종의 32년 동안의 치적을 잘 요약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실록》 32년 2월 22일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임금이 인자하고 명철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였고, 효성 있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대국을 섬기는데 지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 했으며, 구족(九族, 위아래 9대 친족)과 도탑게 화목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일을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아 제도를 분명하게 갖추어 놓았으니, 그물[網]을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열려서, 섬에 사는 왜인과 야인(野人)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 30여 년 동안, 백성이 전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었습니다. 문화와 교육이 크게 일어나서 크게 성함이 볼 만하였으니, 세상을 뜨신 날에 멀고 가까운 곳 사람들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32/2/22) "
직임 정신 : 능력 살리기
인사에 있어 지금의 차원에서는 뽑은 인재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는 방안을 찾아, 교육하고 북돋우며 신하를 믿고 일하도록 여건을 만들고 키워 주는 일이다.
인재 : 한 시대의 정치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일대의 영특한 인재가 있고 만세의 큰 공을 세웠으면 만세의 특이한 은총이 있는 것이니 이는 고금의 공론이요 국가의 당연한 법규다.(《세종실록》 6/7/11)
우의정 정탁(鄭擢)에게 제사를 내리는 교서에서 말한 것이다. 시정 초기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사람이 곧 정치라는 말을 대변하고 있다. 신분을 뛰어넘는 인사로는 전편에서 예를 든 장영실이 있다.
장영실 : 행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재치 있는 솜씨가 보통 사람에 견줘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장영실에 대하여 임인 계묘년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직을 내리고자 할 때 당시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은 반대했으나 벼슬을 내렸다. 늘 강무(임금의 주관 아래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행사)할 때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15/9/16)
세종은 장영실에 대해 ‘나의 곁에서 심부름한 친분이 공이 아니라 그의 기술을 높이 산다’라고 했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라고 하자 황희는 태종 때 평양 관노 김인(金忍)이 있었는데 날래고 용맹하여 호군에 임명한 바 있다고 하며 임금이 따랐다. 장영실은 태종 때 경주 관노에서 올라왔다. 그는 제련(製鍊)ㆍ축성(築城, 성을 쌓는 일)이나 농기구ㆍ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윤사웅ㆍ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으며,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건국 초기에 사람이 신분제도보다 더 절실하고 세종이 이를 현실화했다.
기타 몇 관료에 대한 예가 있다.
하경복(河敬復)의 경우는 세종 때 동북면을 지킨 장수인데 어머니가 아프자 세종은 약을 보내 지극히 보살피고 토지와 쌀도 주었다. 장영실은 앞에서 보았듯 경주 관노비에서 종3품의 대호군까지 올랐고. 그리고 아전 출신의 이예(李藝)를 재상급인 동지중추원사(종2품)으로 발탁해 외교관으로 중용한 것, 또한 아버지는 강릉 군수이자 어머니가 천인이었던 황희(黃喜)를 정승으로 임용한 예가 그 하나다.
유능한 통역사 김하(金何)와 천문에 뛰어난 이순지(李純之)를 각각 첨지중추원사와 동부승지로 발탁한 것도 세종의 능력 있는 사람을 활용하는 좋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