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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와의 대화가 즐겁다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번 찍어도> 10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옛말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라는 말이 있다. 김 교수는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남편으로서의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니 “홧김에 바람피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심정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전국의 아내들이 귀담아들을 속담이다.)

 

나뭇잎이 뚝뚝 떨어지는 어느 날 오후, 김 교수는 문득 미스 최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가을 햇살은 따사로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 속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오동나무에서 커다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자기의 인생도 언젠가 끝이 나고, 저 오동나무 잎처럼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상념에 사로잡혔다.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그날 김 교수의 행동은 분명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왜 그랬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날은 매우 아름답고도 쓸쓸한 가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서 받은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며 10초 정도 망설였다. 그러다가 김 교수는 크게 용기를 내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침 미스 최가 받았다.

 

“여보세요, 김00 교수입니다.”

“아, 오빠세요? 저에요.”

“그래, 오빠다. 그런데 거기는 어디니?”

“여기, 잠실이에요. 그런데 오빠, 거기는 어디에요?”

“학교야.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오빠 덕분에요.”

“그런데, 자네, 아리랑은 읽고 있나?”

“예. 참 재미있는 소설이네요. 어제 다 읽었어요 오빠. 그렇지 않아도 오빠에게 다 읽었다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어떻게 알고서 귀신같이 전화를 하네요. 내일 한 번 만나요 오빠.”

 

 

김 교수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아리랑 제1권을 읽고 전화하면 만나 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막상 아가씨가 만나자고 하니까 막연히 불안하다. 불안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제 와서 약속을 깰 수도 없고.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가 스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그렇지, 아리랑 1권을 읽고서 만나기로 했지? 좋아. 사나이 약속은 지켜야지. 그런데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

“우리 집은 잠실에 있어요. 오빠, 잠실 석촌 호수 건너편에 뉴스타 관광호텔이라고 아세요?”

“관광호텔?”

“오빠, 위치를 모르세요?”

“가보지는 않았지만, 예쁜 아가씨가 만나자는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은 저녁 6시쯤이면 어떨까? 내가 여기 수원에서 조금 일찍 퇴근하면 6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네, 좋아요, 오빠. 내일 6시에 뉴스타 관광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요, 오빠~~.”

미스 최는 마지막 오빠라는 말을 매우 다정스럽게, 약간 느리게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뉴스타 관광호텔이라는 이름은 책에서 한번 본 기억이 있다. 유명했던 왕년의 영화배우 엄앵란이 이제는 유명한 텔레비전 진행자가 되었는데, 1997년에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 책을 사서 읽어 보니 중간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젊어서는 그렇게 예쁘던 엄앵란이 애 둘 낳은 후로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었다. 더 이상 영화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인 신성일이 대구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했다가 떨어지고, 빚더미에 쌓이게 되었다. 엄앵란은 먹고 살기 위하여 대구에 식당을 열었다. 엄앵란은 그 뒤 무려 17년이나 식당 아줌마로서 일하게 된다. 신성일은 돈이 없어 비실비실 노는데, 어느 날 뉴스타 관광호텔 사장에게서 신성일 부부를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호텔 사장님이 말했다.

“저는 온갖 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던 시절, 두 분이 나오는 청춘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꿈이었습니다. 특히 신성일 선생님은 젊은 날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렇게 초라하게 사시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에 다시 출마하시든지, 또는 다른 사업을 하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돈은 얼마든지 대겠습니다.”

 

신성일 씨는 영화 사업을 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사장님은 현금으로 3억을 전해 주었다. (요즘에야 전세방 하나도 모두 억억 하지만, 3억 원이라면 그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이었다.) 책에서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때 호텔 사장님은 돈을 주면서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다. 오히려 사업자금이 더 필요하면 언제라도 말하라고 한다. 세상에는 돈을 벌어서 그렇게 멋지게 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40대 남자가 20대 젊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비록 그 여자가 술집 여자일지라도. 하여튼 남자가 여자를 만나 대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김 교수는 옛날에 읽었던 신문 기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십여 년 전, 번스타인(1918~1990)이라는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한국에 왔을 때 신문기자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신문기자는 백발이 휘날리는 번스타인에게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번스타인은 “나의 인생에서 즐거운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지휘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젊은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김 교수는 “늙은이가 주책이군!”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노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다는 말인가? 세월이 흘러 김 교수는 이제는 번스타인의 말에 100% 동의하고 있다. 김 교수가 그만큼 성숙해졌다고, 인생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