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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바가지 잘 긁는 현대 아내들의 필독서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번 찍어도> 1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남자나 여자나 바람피우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책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은 ‘최초의 불륜’ 또는 ‘최후의 로맨스’에 빠져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불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아내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 교수는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자만심에 빠진 현대의 아내들에게 다음과 같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남편은 바람피울 생각이 나게 된다. 너무 방심하지 말아라.”

 

어느 날 김 교수는 그 책을 슬쩍 아내의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출근하였다. 그리고서는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보니 지금까지 딴방에서 자던 아내가 바로 옆에 누워 있지 않는가? 그 책은 효과가 있었다. 몇 주 계속되던 별거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김 교수는 궁금하여 이튿날 저녁, 자리에 누워서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왜, 아들이 아직 입시가 끝나지 않았는데 경건하지 못하게 내 곁으로 왔느냐고? 아내의 말인즉 어느 날 밤늦게까지 《아버지》 책을 읽고 나서 건넛방으로 갔다. 자는 남편을 바라보니 웬지 주름살이 있는 것 같고, 또 측은해 보였다나? 아무려나! 《아버지》 책은 바가지를 잘 긁는 현대 아내들의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그 뒤 김 교수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았다. 요즘 댁의 부부 관계는 어떠냐? 뜻밖에 부부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교수는 남편에게 《아버지》 책을 빌려주면서 부인에게 읽게 하라고 권하였다. 십중팔구 결과는 ‘효과 있음’으로 나왔다. 김 교수는 “책을 빌려주어서 고맙다”라고 점심도 몇 번 대접받았다.

 

 

며칠 뒤, 미스 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리랑》 제2권도 재미있게 읽었노라고. 그러면서 책 읽은 소감도 이야기할 겸 한번 만나자고 한다. 이거 큰일이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러다가 정말로 태백산맥 제10권까지 갈 모양이네. 인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부딪혀 보는 거야. 나는 너무 교과서적으로 살아왔는데, 이번 기회에 다른 세상도 한번 구경해 보자. 퇴근하면서 잠실로 가겠다고 하니, 미스 최는 보스에서 만나자고 한다. 김 교수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고 “가능하면 오늘 밤에 한 번 들리겠다”라고 막연한 약속을 하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김 교수는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녀가 둘만 만나면 아무래도 일이 날 것 같다. 자신이 없다. 김 교수는 친구인 안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사장은 대학 동기인데 조그마한 오퍼상을 나름대로 잘 운영하고 있었다. 돈도 좀 번 모양이다. 안 사장은 다른 약속이 있으니 조금 늦게 만나자고 한다. 그래서 사당역 지하에 있는 메트로 커피숍에서 밤 8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은 12월 초였는데, 오후부터 수도권에 기습적으로 첫눈이 쏟아져 내려 길이 엄청나게 막혔다. 할 수 없이 차를 학교에 두고 퇴근 버스를 탔다. 버스도 막혀서 예정보다 1시간이나 늦게 밤 9시에 겨우 약속 장소에 갈 수 있었다. 서울이라는 공룡 도시에서 약속 시간에 이삼십 분 늦는 것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 1시간 늦는 것은 좀 심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조금 느린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손말틀(휴대폰)이 보급되는 초기였다. 값도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평소에는 ‘손말틀이 무슨 필요가 있나?’라고 고집을 부리던 김 교수였지만 그날만은 손말틀이 아쉬웠다. 안 사장이 기다려 줄지 염려를 했는데, 다행히 눈이 내려 교통이 막혔다는 것을 아는 안 사장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김 교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한 잔 사겠다고 제안했다.

 

“안 사장, 늦어서 미안해. 오늘은 내가 한 잔 사지.”

“교수가 무슨 돈이 있나?”

“이 사람아. 너무 무시하지 말게. 얼마 전에 연구 용역 과제를 하나 땄는데, 연구비에서 인건비 좀 조정하면 되네. 아무리 친구 사이지만 자네가 3번 사면 나도 1번은 사야 체면이 서지. 계속해서 빈대 노릇만 해서는 되겠는가?”

“좋을 대로 하게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