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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열민지사(悅民之事, 백성을 기쁘게 할 일)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요즘 정치에서 ‘국민은 언제나 옳다’라는 말을 듣는다. 세종은 신하들의 관점과 달리 백성 편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 ‘열민지사(悅民之事)’에 대해서 두 개의 뒷이야기가 있다.

 

백성이 원망하는 것과 백성을 기쁘게 할 일을 진술하라

 

세종 25년에 비가 오지 않자 비를 오게 하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하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나이 든 자에게 영직(직함만 있고 일이 없는 허직)을 제수하고 환상(還上,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던 일)을 면제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고려 때에는 원단제(圓壇祭)를 지냈었는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참례(僭禮, 분수에 맞지 않는 지나친 예의)의 일은 다 혁파하셨다. 원단제를 혁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 예법에 비록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 지내고, 제후(諸侯)는 산천에 제사 지낸다고 하였으나, 이는 중국 땅 안의 제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궁벽하게 나라 밖에 있으므로, 전일에 변계량(卞季良)이 ‘비를 빌려고 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지내야 한다.’라고 강청(强請)하여, 비를 얻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에 제사 지냈기 때문에 비가 내린 것이다.’ 하였으니, 이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제사할 것이다." 하니, 승지(承旨) 이승손(李承孫) 등이 아뢰기를,

 

"사람이 궁(窮)하면 반드시 하늘을 부르고, ...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며, 그 의물(儀物)도 또한 마땅히 형편에 따라서 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나온다. 신개ㆍ하연ㆍ권제는 의논하여 아뢰기를,

 

"하늘에 제사한다는 것이 이미 대체(大體, 어떤 일이나 내용의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에 어긋난 것이오니 하늘이 어찌 내려와 제물을 받고 비를 오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농사가 한창일 때 가을 가뭄이 너무 심하여, 내 마음이 민망하다. 각사(各司)에서 임기를 채운 나이 40살 이상인 자는 영직(影職)을 제수하고, 또 정사년 이전의 환상(還上)을 면제하여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또 여럿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가을에 곡식을 받아들일 때 1 말이 부족하여도 할 수 없거늘, 하물며 감해주는 수량이 1섬, 2섬, 3섬이 되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액수를 헤아려 줄이면 역시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의 환상(還上)에 대한 줄여줄 수량을 헤아리고 마감)해서 아뢰게 하고, 기타의 백성이 원망하는 것과 백성을 기쁘게 할 일을 각각 다 진술하라." 하니, 신개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공법(貢法)을 백성이 매우 편하게 여기는 데 다만 하전(토질이 좋지 않은 밭)의 세금이 무거운 것을 싫어한다 하옵니다. 만약 다시 하전을 심사하여 상ㆍ중ㆍ하의 3등으로 정하고 말줄여 세납을 거두면, 백성이 더욱 편하게 여길 것이옵니다." 하고, 하연ㆍ김종서는 아뢰기를, "만약 다시 논밭을 측량하고, 하전(下田)을 3등(等)으로 나눈다면 반드시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 것이오니, 예전대로 하여 줄여 주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여러 의견을 거쳐 임금이 즉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조서강ㆍ이승손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내가 뛰어나지 못해서 일의 옳고 그른 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여 비웃음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또 말을 변하여 조세(租稅)를 줄이자고 청하니, 공법의 불편함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조세를 보면 예전보다 배(倍)나 되니 백성들의 원망을 역시 알 수 있다. 내가 공법으로 많이 거두어서 나라를 부(富)하게 하려 함이 아니었다. 다만 손실법(損實法)의 폐해를 염려하여 이 법을 세운 것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겁게 거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은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니, 공법을 그대로 하면서 백성에게 편리할 것을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여럿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하전(下田)의 조세를 줄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환상(還上)은 경기의 3분의 1을 감하게 하고, 충청도는 7분의 1을 감하게 하고, 강원ㆍ황해도는 4분의 1을 감하게 하고, 평안ㆍ함길도는 5분의 1을 줄이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25/7/10)

 

백성을 위해 세 부담을 줄여 준 것이다.

 

 

벼락이 떨어진 일

 

세종 26년 7월 10일에는 벼락이 연생전(延生殿)과 창덕궁 옛 중추원에도 떨어졌다.

 

임금이 우의정 신개(申槪) 등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 연생전에 벼락이 떨어져 궁녀가 벼락에 죽었으니 어찌 재변(災變)이 아니겠는가."

 

"지금 하늘이 내전(內殿)에 벼락을 떨어뜨려 꾸짖는 뜻을 보이니 내가 매우 두렵다. 사령(赦令)을 내려 비상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무릇 백성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凡所悅民之事, 僉議以聞)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하늘의 천둥·벼락은 양기(陽氣)가 서로 부딪치는 것으로, 그 기운에 저촉되는 자는 죽는 것입니다. ... 백성을 즐겁게 할 일은 근간에 한재로 인하여 남김없이 거행하였으므로 지금 다시 아뢸 것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시위 갑사(寺衛甲士)의 수를 줄이며, 양계(兩界)의 성 쌓는 공사를 정지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동서 양계의 방어는 가장 긴급한 것이므로 그곳의 성들은 점차로 축조해야 마땅할 것이옵고 이 일로 인하여 폐지할 수 없사오니, 예전 그대로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재변(災變)이 일어나니 감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너그러운 은전(恩典)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26/7/10)

 

기회가 있으면 백성에게 무언가 베풀려는 세종과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보게 된다. 정치란 예부터 ‘국민 복지’ 함께 ‘국가 운영’이라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음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