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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학 100리길, 혼자라면 걷겠는가?

효석문학 100리길 제3구간 답사기 (10)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자: 2024년 5월 27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김혜정, 윤석윤, 이상훈, 전선숙, 최동철 (6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6월 3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3구간은 대화 땀띠공원~방림농공단지다. 평창군에서 만든 소책자에서는 이 길의 이름을 ‘강따라 방림 가는 길’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굽이치는 대화천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계곡이 합류된 평창강을 따라 고봉과 절벽이 조화된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구간으로 주변경관을 조망하며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다.

 

특히, 제3구간은 제방길과 강변길로 이루어져 있어 자전거 투어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의 산과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연의 정취와 멋진 풍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제2-2구간의 도착지가 제3구간의 출발지가 된다. 땀띠공원은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연못의 유래에 대해서 돌비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땀띠물 由來

이곳 땀띠물은 그 名稱이 언제부터 유래된 것인지 文獻에는 기록이 없으나 옛부터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몸을 씻으면 땀띠가 깨끗이 나았다고 하여 「땀띠물」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이 고장의 유일한 冷泉으로서 가뭄이 심하여도 항상 일정량의 맑은 물이 땅속에서 솟아나 흐르며, 수온은 항상 10°C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손이 시릴 정도로 차고, 겨울철에는 따뜻하여 동네 아낙네들이 빨래터로 이용하기도 하며, 靑龍山 등산객들은 하산하여 이곳에서 몸을 씻고 歸家하는데 이 물에 몸을 씻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한다. 또한 수질이 좋아서 대화시내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들이 이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다. 2003년도에 대화면사무소에서 주변을 정비하여 「땀띠공원」이라 이름 지어 대화면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석글에는 由來, 文獻, 冷泉, 靑龍山, 歸家처럼 한자를 무분별하게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국어기본법>이 있는데 이 법 제14조 제1호에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평창군에서 만들어 놓은 이 돌비석도 한글로만 쓰고 필요할 때는 괄호 안에 한자를 써넣어야만 한다. 저렇게 한자를 무분별하게 써넣으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읽지도 말라는 얘기일까? 평창군은 누구를 위한 평창군인지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비석 서있는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화천루(和泉樓)라는 정자가 나온다. 정자 아래에 지하수가 솟아나 생긴 작은 연못이 있다. 땀띠공원 옆 커다란 공터에서는 2013년부터 평창더위사냥축제가 열리고 있다. 지역소멸을 막고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시작된 더위사냥축제는 땀띠공원, 대화천, 대화5일장, 광천선굴 등과 연계하여 해마다 8월 초순에 진행하는데, 성공적인 여름 축제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효석 이야기를 이어가자. 효석은 18살인 1925년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한다. 그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예과 학생지 <淸涼(청량)>에 ‘旅人(여인)’을 발표하기도 하고, 학생회 기관지 <文友(문우)> 간행에도 참여한다. 본과에서 그는 영문학을 전공으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소설 공부를 하면서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림5>

 

그가 쓴 <노마의 십년>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문단적으로 처음 소설이라고 썼던 것이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된 「도시와 유령」이었다. 파인(巴人)의 호의적 인도의 힘입음이 많았다. 다음 동지(同誌)에 「기우(奇遇)」를 발표했던 것도 역시 씨를 통해서였고 씨가 신문사를 나와 잡지 《삼천리》를 시간(始刊)했을 때에는 동지를 통해서 「북국점경(北國點景」 등 단편을 발표하게 되었다. 희곡도 시험해서 무수한 작품을 썼으나 사정에 의해 활자가 되지 못한 편도 많았다. … (가운데 줄임) … 작품이 시작된 것은 학부를 마치기 전후해서 잡지 《대중공론(大衆公論)》에 「노령근해(露領近海)」 등을 쓴 때부터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고보 시절의 일본인 은사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취업하게 된다. 그가 담당한 업무는 도서 검열이었다. 자신이 발표했던 「도시와 유령」 같은 사회주의 경향을 띤 작품들이 검열의 대상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취업한 지 15일 만에 사직하고 나와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이효석은 화가 지망생이었던 이경원을 만나 1931년에 연애결혼을 한다. 1932년에 효석은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鏡城)으로 이주하여 경성농업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효석은 「돈(豚)」, 「수탉」 등 순수문학 작품을 발표하면서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 결성에도 참여한다.

 

이제 답사기로 돌아가자. 황병무 선생이 답사 소감을 한 편의 시로 써서 답사 며칠 전에 단톡방에 올렸다. 여기서 소개한다.

 

         효석문학 100리길을 걸으며

 

표지판만 심심하게 서 있는 효석문학 100리길

소문 난 둘레길도 아니고

꼭 한 번 걸어야 할 순례길도 아닌

이 길을 혼자라면 걷겠는가?

 

풀꽃 하나에도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야기가 통하는 이들과 함께라서

산 너머 마을에선 벌써 떠난 봄을

여기만 봄꽃이 피는 줄 이야기꽃을 덧피웠네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서는

아이들의 돌팔매질로

매년 깨진 기왓장을 들어내면서도

개살구나무를 베지 말라고 하셨다던

신부님네 외할머니 이야기와

분꽃나무 꽃향기에 묻어나온

코티분에 얽힌 전투기 동체착륙 사건 등

게다가 생전 처음 맛보는 산마늘 김밥

 

그때는 그랬었지

가난했지만 외롭지 않았었지

일곱 살 어린 효석의 추억이 되살아난

효석문학 100리길

 

말은 음성(소리)이어서 사라지지만, 글은 문자(형태)여서 남는다. 말을 글로 바꾸면 보존된다.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이처럼 글로 남기면 사라지지 않고 오래 보존될 것이다.

 

아침 9시 35분에 우리는 땀띠공원을 출발하였다. 날씨는 온화하지만 덥지는 않았다. 바람이 약간씩 부는 전형적인 봄 날씨이었다. 기온은 섭씨 19도 정도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화천루에서 내려오자, 효석문학100리길 표지판이 나타났다.

 

 

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 가자 등산로가 나타난다. 우리는 선두를 따라 계속 산을 올라갔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 길이 아니었다. 땀띠교 건너편에 서있는 제3구간 안내도의 그림을 보니 원래 효석문학길은 버스터미널을 지나 대화면 중심가를 지나는 길이었다. 평창군 담당자는 표지판을 수정해 주기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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