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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문학100리길' 답사기

꿀벌의 멸종은 식량위기로 닥칠지도

효석문학 100리길 제3구간 답사기 (1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앞부분에 ‘대화장’이 나온다. 봉평 장에서 허생원은 물건이 안 팔려서 재미를 못 보았다. 그래서 일찍 거두고 밤새 걸어서 대화장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허생원이 조선달에게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렷다.”

 

윗글을 읽어보면 아마도 대화장은 봉평장보다 크고 장사가 잘되는 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사실이다. 대화면은 평창군의 중간 지점에 있다. 조선 시대에 대화면은 강릉에서 한양 가는 간선 도로가 통과하기 때문에 봉평보다 컸다. 봉평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외진 동네였다.

 

대화면은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영월, 평창, 정선의 곡물과 잡곡이 대화로 유통되었다. 대화의 특산물로서 산채와 고추가 유명했다. 특히 대화초는 껍질이 두꺼워서 가루가 많이 나오고 매운 것이 특징으로 서울 경동시장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통틀어 교통의 요지였던 대화의 5일장은 규모가 컸다. 조선 순조 때 편찬된 《만기요람》에는 “전국 5일장 중 대화장이 10대 시장에 포함되었으며 물자 교역이 활발하고 번창했던 시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화장은 옛날부터 동대문 밖에 나서면 제일가는 재래시장이라고 불렸다.

 

원래의 문학길에서 벗어났던 우리는 대화남부교회 앞에서 원래의 문학길과 다시 만났다. 교회 마당 옆에 쉼터가 있었다. 우리는 10시 15분에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휴식을 취했다. 김수용 선생이 큰 배낭에서 막걸리 그리고 안줏감으로 고추전과 깻잎전을 꺼내었다. 깻잎전은 깻잎 사이에 고기를 갈아 넣어서 만들었는데, 맛이 환상적이었다. 모두 맛있다고 칭찬하였다. 남자들은 요리 잘하는 부인과 사는 김수용 선생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윤석윤 선생 부인이 과일샐러드를 사람 수만큼 만들어왔다. 우리는 호사스러운 간식을 즐겼다.

 

오전 10시 32분에 다시 출발하였다. 우리는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가한 길을 한가롭게 걷는다. 우리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화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길의 왼편, 하천 쪽으로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이른 봄에 벚꽃이 피면 멋진 꽃길이 될 것이다. 내년 봄에 한번 와 보아야겠다.

 

길의 오른쪽으로는 여러 가지 작물을 심은 밭이 나타났다. 간간이 나타나는 시골집에서는 강아지가 우리를 보고 짖는다. 시골 강아지는 짖는 소리도 그렇게 사납지 않다. 도시에 사는 강아지에 견줘 아마도 스트레스가 적을 것이다. 모내기가 끝난 논도 보였다.

 

 

 

 

벚꽃과 살구꽃은 이미 지고 이제는 아카시아꽃, 산사나무꽃이 만발하다. 풀꽃으로는 작약, 고들빼기, 애기똥풀, 메꽃 등을 볼 수 있었다. 오전 11시 10분에 우리는 근사한 정자를 발견하고 두 번째 휴식을 취했다.

 

 

정자에 앉아 쉬면서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최근의 환경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약 때문에 벌이 줄어들자, 꽃가루받이가 잘 안되어 과수원의 과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농어촌공사에서는 꿀벌귀환사업의 하나로 인공수분이 어려운 취약 과수 농가에 마을 단위로 벌통 250개를 빌려주는 사업을 2023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과일의 수분을 위해서 벌을 일회용으로 빌려주는 것이다.

 

일찍이, 벨기에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는 《꿀벌의 생활》이라는 책에서 “만약 지구에서 벌들이 멸종된다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오직 4년뿐이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한 바 있다. 이처럼 꿀벌이 위기에 처하자, UN에서는 2017년에 꿀벌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5월 20일을 ‘세계 꿀벌의 날’로 정하였다. 꿀벌의 날이 5월 20일인 이유는 18세기 슬로베니아에서 현대 양봉 기술을 개척한 안톤 얀샤(Anton Jansǎ)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고도 열심히 일하는 꿀벌의 능력을 칭찬했다.

 

오마이뉴스 <아카시아꽃 만발한 5월... 벌이 안 보인다> (2024.5.12.) 기사에 따르면 5월 초에 아카시아꽃이 피기 시작한 뒤 10여 일 동안 아카시아꽃에서 벌을 한 마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희석 반려식물연구원 원장은 “올해처럼 아카시아꽃이 화사하게 만개한 경우가 없었는데 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벌은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옳기는 수정을 해줘 유실수를 포함한 농작물들이 열매를 맺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매개체가 사라지고 있어요. 기후 변화로 농작물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꿀벌마저 사라진다면 농업이 위기입니다”라며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기사에 따르면 벌은 사람이 키우는 작물 1,500종 가운데서 약 30%의 수분을 책임진다. 그중에서도 세계 식량의 90%를 담당하는 100대 주요 작물 가운데 무려 71종의 수분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꿀벌이 없으면 과일, 채소, 곡물 성장에 타격을 주고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면 식량 위기가 닥친다. 꿀벌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곤충 한 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농약을 쓰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어디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오전 11시 20분에 우리는 꿀벌의 멸종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출발하였다. 꿀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걸어가는데, 간간이 꽃이 만발한 아카시아 나무가 나타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 보니 아카시아꽃에 벌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환경주의자들의 과도한 염려가 아니고 실제로 다가오는 현실이 맞는 것 같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가 닥치기 전에 꿀벌의 멸종에 따르는 식량위기가 먼저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나뿐인 지구에서 우리 아들딸과 손자 손녀들이 살아갈 미래가 걱정된다. 내가 꿀벌을 보호하고 우리 후손을 포함하는 인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막연하기만 하다.

 

왼쪽에는 대화천이 유유히 흐른다. 하천가에는 양쪽으로 갈대가 무성하다. 하천 넘어 높지 않은 산에는 신록이 가득하다. 신록을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며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안과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녹색을 오래 바라보면 백내장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금 가자 오른편에 정자가 다시 나타난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정자가 2개나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추측했다. 아마도 서로 다른 마을이기 때문에 각각 정자를 세웠나 보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정자가 아니고 선정비(善政碑)였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부사 이응우 청덕선정비

 

부사 이응우(府使 李膺愚)는 정축년(1877)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가 경진년 능주목사(綾州牧使)로 자리를 옮겨 갔으며 보폐전(補弊錢) (재정이 부족하여 운영이 어려운 기금이나 기관을 돕는 명목으로 지급되는 돈)을 나누어 내도록 하였고, 휘리세(揮罹稅) (후릿배로 후리질을 하여 잡은 고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을 탕감하여 주는 등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렸으며 특히 선비 양성에 사용토록 곡식 100석과 자금을 지원하며 선정을 실천한 관리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왔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청덕선정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맙소사. 전체 문장이 마침표 하나로 되어 있는 한 문장이다. 비석을 세운 날자는 ‘乙卯十月 日’이라고 쓰여 있는데, 몇 년도 인지 알 수가 없다. 《평창군 지명지》 (평창문화원, 2015년 발행) 348쪽에는 이 선정비의 건립 연대가 187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손말틀(휴대폰)로 ‘을묘년’을 입력하고 검색해 보니 1855년 1915년과 1975년이 을묘년이다. 평창군 문화재 담당부서에서 이러한 불일치를 해결해 줄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