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반지 선물을 사기 위하여 두 사람은 프라이드를 타고 잠실 롯데 백화점으로 가서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층 여성용품 매장으로 갔다. 가장 접근하기 쉬운 1층 매장은 귀금속, 화장품, 구두, 가방 등 여성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파는 곳이다. 남자들이 돈을 열심히 벌면 결국 쓰는 것은 여자들이다. 백화점으로서는 여성고객 중심으로 매장의 위치를 정해야 할 것이다. 선물을 받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겠지만, 특히 여성들은 선물을 받으면 쉽게 마음을 여는 법이다.
여자가 선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책에서 배운 것은 아니고 살다 보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 뒤에 아내를 달래려면 다음 날 작은 선물을 들고 가면 쉽게 풀렸다. 하다 못하면 호떡 2,000원어치라도 사 들고 들어가면서 ‘여보, 이거 당신 주려고 사 왔어’라고 말하면, 대개는 마음이 풀린다.
여자들은 특히 보석을 좋아한다. 요즘에는 젊은 남자들도 귀걸이를 하지만 여자들이 귀걸이를 하고 보석 반지를 끼는 것은 꽤 역사가 깊은가 보다. 옛날 선사시대의 조개 무덤인 패총에서도 여자의 장신구가 발견되었으며 박물관에 가보면 옛날 사람들이 쓰던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를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2,500년 전에 살았으며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부처님의 말씀에도 “아내에게 보석을 사 주어라”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그런 불경 구절이 정말로 있는지 직장 동료로서 독실한 불교신자인 장 교수에게 출처를 물어보았다.
며칠 뒤 장 교수가 말하기를 아함부에 나오는 육방예경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지켜야 할 법을 다섯 가지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1) 출입 시 인사할 것, 2) 음식과 의복을 때맞추어 공급할 것 3) 금ㆍ은ㆍ주옥 등의 노리개를 사 줄 것, 4) 집안 살림을 다 맡길 것, 5) 첩을 두지 말 것. 김 교수가 생각해 보아도 지키기 어려운 조항들이다.
불경과 달리 성경에서는 “아내에게 보석을 사 주라”는 기록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단지 신약 성경 어딘가에 ‘마르타’라는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자, 제자들이 아깝다고 비난하는 구절이 나올 뿐이다. 여자의 심리를 잘 안다는 측면에서는 혼인 경험이 있는 부처님이 노총각 예수님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차하고 차 열쇠로 문을 잠그고서 김 교수는 아가씨의 손을 살짝 잡고 걸었다. 이제는 배짱이 생겼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아가씨가 팔짱을 끼자 뿌리쳤는데, 몇 번 만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마음 한구석에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아가씨에게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너의 손을 잡을 정도로 너를 좋아하고 있다”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정말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모르는 체 하지 뭐. 그러다가 그 사람이 아내에게 이야기라도 하게 되면? “거기 간 적이 없는데,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본 모양이지”라고 시치미를 떼지 뭐. 서울에 사는 인구수가 1,000만이 넘는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면 아내는 믿을 거야. 서울에 사는 500만 명의 남자 가운데 비슷한 사람이 좀 많을까!
여러 가지 모양의 보석들이 어지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아가씨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여자가 보석을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시간 좀 걸릴 거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지. 여자마다 아낌없이 돈을 쓰는 품목이 다르다. 어떤 여자는 예쁜 그릇을 보면 안 사고는, 못 배기고. 어떤 여자는 목걸이를 수십 개 가진 사람도 있고. 필리핀의 이멜다 여사는 구두만 2,500켤레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미스 최는 반지 모으는 것이 취미란다. 다른 것은 별로 욕심이 없는데, 어디 가서 예쁜 반지를 보면 꼭 가지고 싶단다. 그래서 보석함에 반지만 20개가 넘는다고 한다.
반지에는 모두 정가표가 붙어 있었다. 웬 반지 하나가 그렇게 비싼지. 정가표를 보니 작은 반지 하나 값이 보신탕 30그릇 값보다 더 비싸다. 백화점 물건이 비싸다는 것은 알지만, 특히 롯데 백화점은 고가품을 진열해 놓은 것 같다. 한참을 둘러보더니 미스 최가 말했다.
“오빠, 여기는 너무 비싸네요. 건너편으로 가요.”
“마음대로 하려무나.”
두 사람은 롯데백화점의 서쪽 편에 있는 저가 상품을 파는 백화점으로 갔다. 같은 건물이지만 그쪽 물건이 더 싼 것은 김 교수도 알고 있었다. 서쪽으로 연결된 통로를 계속 손을 잡고 걸었다. 누가 보면 성숙한 딸의 손을 잡고 가는 아버지로 보지 않을까? 사실 김 교수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물건을 이것저것 고르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아 아내와 물건 사러 왔다가 다툰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나 그날은 최대한으로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고린도 전서 13장)’ 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계속 따라만 다녔다. 이쪽 백화점에도 보석은 1층에 진열되어 있었다. 한참 둘러보더니 미스 최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반지를 정한 모양이다. 점원에게 말하여 진열장을 열고 반지를 꺼내어 손가락에 끼어 본다. 하트 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반지였는데 얼른 가격표를 보니 11만 원이었다. 김 교수가 말했다.
“마음에 드니?”
“오빠, 너무 비싸지요?”
“1년에 한 번이니까 괜찮다. 마음에 들면 사거라.”
김 교수가 지갑을 꺼내니 미스 최가 얼른 점원에게 말한다.
“이것 좀 깎아 주세요.”
점원은 1만 원을 깍아 10만원 만 내라고 한다. 백화점에서도 가격을 깎아 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김 교수는 신용카드 대신 흔적이 남지 않는 현금으로 냈다. 나중에 카드 대금 청구서에 xx백화점이라고 찍혀 있으면 아내에게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어 가정 평화를 깰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미스 최는 행복한 기분이 되어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백화점을 나왔다. 김 교수도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또 선물 받은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걸어갈 때도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걸었다. 김 교수는 미스 최를 프라이드에 태우고 보스로 갔다. 이제는 아가씨가 옆자리에 타도 어색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지난번에는 얼마나 불안하였던가? 보스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아리랑》 제6권을 다 읽으면 전화하라고 말하고서 아가씨를 내려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 교수는 올해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 해가 가는구나. 올해는 작년과는 달리 평범한 한 해는 아니었지. 올해에 어찌하다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미스 최를 술집에서 만난 것이 가장 큰 사건이구나. 아직 아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미래를 알 수 없어서 인생은 언제나 흥미로운 것 아닌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알고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