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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퇴직ㆍ황퇴ㆍ정리해고, 비인간화 된 사회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 번 찍어도> 3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해가 바뀌고 나서 며칠 후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기다리세요. 녹음을 남기려면 1번, 무얼 하려면 2번 어쩌고...’ 젊은 여자 목소리의 안내음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편리하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며칠 후, 미스 최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고 인사를 나누고, 그러더니 “오빠, 나 《아리랑》 제6권도 다 읽었어요. 한 번 만나 주셔야지요”라고 애교를 부리며 협박한다. 처음에 3권짜리 장편소설을 시작했더라면 벌써 끝났을 텐데, 12권짜리 《아리랑》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내가 만든 인과응보이니 어쩔 수가 없지.

 

토요일에 한번 만나자고 하니, 주말에는 용평스키장에 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 참... 술집 아가씨가 대학교수 기죽이네. 나는 스키의 ‘스’ 자도 모르는데. 그러면 잘 갔다 오고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하자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김 교수와 격이 안 맞는 것 같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속담이 있는데...

 

겨울 방학이지만 김 교수는 날마다 학교에 나갔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일단 집으로 전화를 건다. 아내가 전화를 받고서 학교에 갔다고 말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방학인데 왜 학교에 가느냐고? 그것은 대학사회가 변한 것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옛날에야 교수 생활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걸핏하면 휴강하고. 휴강하면 교수도 좋고 학생도 좋고. 방학 때에는 학교에 나가지 않고. 개학 뒤 몇 주 안 지났는데 그만 시국이 어수선하여 정부 명령으로 휴교하고. 시험은 레포트로 대신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사회에도 경쟁 개념이 도입되어 교수 사이에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우선 휴강을 할 수가 없다. 휴강을 하면 반드시 보강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보강 시간을 잡기가 어렵다. 학생들도 휴강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싼 등록금 냈는데 왜 휴강을 하나?’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또 한 해에 두 편 정도의 논문을 써야 한다. 교수 개인의 평가항목에는 한 해에 한편 이상 논문을 내게 되어 있지만, 모두가 다 한 편은 내니 두 편 정도 내야 그래도 좋은 평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외부 연구 과제를 따다가 학교에 경상비 명목으로 얼마를 기부해야 한다. 기부금의 액수에 따라 평가 점수가 달라진다. 학회 활동도 외부 봉사 점수로 환산된다. 한마디로 교수의 활동 하나하나가 모두 점수화되어 연말이면 100점 만점에 몇 점이라고 점수가 나온다. 점수에 민감한 것은 학생이나 교수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점수에 민감할 것이다. 대통령도 여론조사 점수에 신경을 쓸 것이다.

 

 

점수라는 제도는 여러 사람을 순서 매김 하는 어쩔 수 없는 제도라지만 어찌 보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측면이 있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집단에서는 점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다섯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는 자녀 모두가 사랑스러운 것이다. 물론 어느 한 자녀가 더 사랑스러운 면이 있고, 어느 한 자녀는 더 미운 짓을 많이 하여 밉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식 간의 차이는 ‘조금 더하고 조금 덜한 정도’에서 그친다. 만일 어느 부모에게 다섯 명의 자식을 점수화하라고 하면 난감한 입장이 될 것이다. 조금 못하기는 하지만 1점 차이, 2점 차이라고 점수라는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왠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회사는 가족 같은 집단인가? 회사 사장님이야 “우리 모두 한 가족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합시다”라고 말을 하겠지만 회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 집단이다. ‘한 가족처럼’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많은 회사원이 회사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일해 왔는데, 작년에 불기 시작한 ‘명퇴 바람’은 이러한 생각이 허구였음을 여실히 들어냈다. 명예퇴직 당한 회사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깨달은 것은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회사의 정의다.

 

김 교수의 동창도 대기업에서 영업부장을 잘하다가 작년 말에 퇴직을 강요받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명퇴 시절이 좋았단다. 요즘에는 ‘황퇴’라고 해서 황당하게 퇴직당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다. 황퇴와 명퇴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명퇴는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것이니까 회사 측에서 퇴직금 외에 두둑한 위로금도 주는데 황퇴는 한마디로 ‘쫓아내는 식’이기 때문에 퇴직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황퇴보다 더 살벌한 것이 IMF 이후에 등장한 ‘정리해고’다. 중소기업에서는 부도가 나서 퇴직금도 못 받고 쫒겨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리해고 이후에 ‘구조조정’이라는 부드러운 말이 나왔으나 내용은 마찬가지이다.)

 

가족 다음으로 인간적인 집단은 교회나 절 등의 종교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가 다니는 교회에서 보면 숫자를 이용한 점수화가 슬그머니 등장하였다. 컴퓨터가 교회경영에 도입된 이후 신자 관리 역시 최신 경영 기법을 도입하여 집사(교회에서 중간 지도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분)들의 행적은 항목별로 기록되고 점수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수는 장로(교회에서 최고 지도층으로 말할 수 있는 직분) 선출시 참고자료가 된다. 그전에 다니던 작은 교회에서는 신도들을 점수화하지는 않았었는데, 신도 수가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점수화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교회가 커지면 인간을 수치화하는 비인간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므로, 진실로 좋은 교회는 작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신도 1만 명을 자랑하는 교회에서 가족적인 교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