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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최와의 만남을 국악처럼?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 번 찍어도> 3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 주일쯤 지난 뒤 미스 최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 교수는 은근히 금요일이 기다려지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언제까지 미스 최를 만나야 하나? 이번에 만나면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할까 보다.

 

금요일은 마침 대학 입시의 면접일이었다. 김 교수가 속한 면접 팀은 음악 대학 지원자를 면접하게 되었다. 면접은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지고 응시자의 답변 태도와 행동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점수 차가 크게 나지 않게 채점하지만 1, 2점의 점수는 가감할 수 있다. 질문은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그날 음악대학 입시생이라는 점을 살펴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국악과 서양음악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응시자는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학생들의 답변은 대개 비슷하였다. 이들의 답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얻어진다. 서양음악은 7음계인데, 국악은 5음계이다. 서양음악은 화성을 중요시하여 벽돌 같은 몇 개의 음이 합쳐져야 아름다운데, 국악은 음 하나하나가 수석(壽石)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서양음악은 쉼표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데, 국악은 휴지부라고 해서 길이가 연주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서양음악은 음의 조화가 아름다운데, 국악은 음의 여운이 아름답다. 서양음악에 견줘 국악은 대개 느리다. 서양음악은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 많은데, 국악은 한이나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 서양음악은 곡의 속도가 거의 일정한데 국악은 연주자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다. 서양음악은 귀족적인데 견주어 국악은 서민적이다. 서양음악은 무대가 필요한데 국악은 마당에서 연주해야 제격이다. 서양음악에서 관객은 조용히 듣기만 하는데, 국악은 관객이 추임새를 넣으면서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을 종합하면 나름대로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가 미스 최를 만나는 것은 서양음악은 아니고 국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도가 느리고,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끝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미스 최와의 만남을 국악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왜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들이 재미있었다. 대부분 학생은 피아노가 좋아서 전공으로 선택했다는 막연한 대답이었지만 어떤 학생은 독특한 답변을 하였다. 클라리넷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고2 때인가 어느 작곡가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처음 들은 후에 “내가 평생을 맡길 악기는 바로 이 것이다” 라고 순간적으로 느낌이 왔다고 했다. 또 어떤 학생은 우연히 오보에(oboe) 연주를 듣고서 한 귀에 반했다고 한다. (한눈에 반했다는 표현과 비슷하다!) 약간 나이든 어떤 학생은 첼로 연주를 듣는 순간 첫사랑의 느낌이 들어서 선택했다는 대답도 나왔다.

 

김 교수가 면접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음악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악기의 선택은 애인(愛人)의 만남처럼 숙명적이라는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거의 숙명일 것이다. “왜 그 여자가 그렇게 좋게 보였나?”라는 질문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질문이다.

 

김 교수는 옆방의 장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장 교수가 알고 있는 비구니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은 여고 2학년 때에 우연히 경상도에 있는 어느 절을 찾아갔단다. 산길을 오르고 꾸불꾸불한 숲길을 돌아 절 마당에 들어선 순간, “아, 여기가 내가 있을 장소이구나”라는 강한 느낌이 왔었단다. 그 뒤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비구니 대학에 입학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 특별한 느낌이 왔을까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는데 그 만남에 대해서 ‘왜?’라고 물을 수 없다. 설혹 묻더라도 명확하게 답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면접시간이었다. 저녁 4시쯤 면접이 끝나고 김 교수는 잠실로 향했다. 김 교수는 운전을 하면서 “미스 최를 만난 것도 운명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수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최초로 술을 마신 이후 술자리에서 만난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군대 생활과 연구소를 거쳐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를 세어 보면 100명이 넘을 것이리라. 그렇지만 어찌하여 하필 미스 최에게 마음이 끌려 이렇게 밀회에 밀회를 거듭하며 불안해하는가? 술집 밖에서 술집 아가씨를 만난 것은 미스 최가 처음이다. 그러니 이 만남은 운명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커피숍에서 미스 최를 유심히 보니 예전과는 달리 매우 나이가 든 여자처럼 보였다. 아마도 조금 전 면접하면서 이제 갓 열여덟 또는 열아홉의 피어나는 꽃 같은 소녀들을 보다가 스물다섯 살 아가씨를 보니 늙게 보이는가 보다. 사람 눈이란 그렇게 간사한 것이다. 앞에서 점수화의 단점을 이야기했지만,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면접 본 여학생들이 모두 90점대라면 미스 최는 80점대에 머무를 것 같다.

 

여자는 젊을수록 예쁘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예쁜 법이다. ‘가장 좋은 화장품은 젊음’이라는 말도 그래서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요즘 여자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덕지덕지 화장하여 그 싱싱하고 아름다운 젊음을 화장품으로 칠해 버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김 교수가 현실로 돌아와 앞에 앉은 아가씨에게 물었다.

“스키장에는 잘 다녀왔어?”

“네, 오빠. 강 사장님하고 언니들하고 같이 갔어요.”

“스키는 잘 타나?”

“아니에요. 오빠. 이번이 두 번째인걸요. 계속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래도 모처럼 기분도 전환되고 재미있었어요.”

 

스키장에 다녀온 아가씨와 앉아 있으려니 괜히 거리감이 느껴졌다. 김 교수는 스키장에 가 본 적이 없어서 더 이상 화제를 이끌어가기가 어려워서 다른 말을 꺼내었다.

 

“그런데, 미스 최. 생일이 언제야?”

“왜요, 오빠? 선물 사주시려고?”

“에이 이 녀석.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언제야?”

“네, 음력으로 1월 7일인데, 올해는 양력으로 2월 14일 일거에요. 오빠.”

“다음 달이구나. 알았다. 내가 안 잊어버리면 그때 축하해 주지.”

“고마워요. 오빠.”

“그런데, 미스 최. 네 주소 좀 적어주렴.”

“왜요, 오빠?”

“너에게 연애편지 한 장 쓸까 해서 말이다.”

“저에게 연애편지를 쓰겠다고요? 오빠 그게 정말이에요?”

“자꾸 오빠, 오빠 하지 마라. 어떤 오빠가 여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겠니?”

“알았어요. 오빠.” 미스 최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습관성인가 보다.

 

김 교수는 아가씨가 주소를 적어준 쪽지를 받은 뒤 조금 있다가 호텔을 나왔다. 그러고는 전과 같이 아가씨를 보스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는 아가씨의 손을 가볍게 쥐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까지 하였다.

 

생각해 보니 우스운 일이다. 술집 아가씨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는 회사에서 일을 잘해야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스 최는 손님 비위를 맞추어 술을 많이 먹으라는 말인가? 2차 가자는 손님의 요구를 잘 들어주라는 말인가? 술은 조금만 먹고 팁은 많이 받아내라는 말인가? 김 교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헷갈리는구나. 김 교수는 아가씨와 헤어진 뒤 아내가 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