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식위민천’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8건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세종 때 8건이다. 다른 임금은 성종이 5건으로 많다. 두 분 다 어질다고 존경받는 임금들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8일 즉위한다. 즉위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먹는 것이 백성의 하늘’이라는 명제를 선언한다. 즉위식에서 선언한 ‘시인발정’(施仁發政, 백성사랑은 임금 노릇의 근본)의 구체적인 시행책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온데, 이제 흉년을 만나 민생이 염려되오니, 각 군의 조세를 경창(京倉)에 전부 바치는 것을 제하고는, 곡식으로 거두어 각기 그 고을에 두었다가, 내년의 씨앗으로 예비하게 하고, 그 농사를 그르침이 더욱 심한 주ㆍ군(州郡)은 조세를 전부 면제하시기를 청하나이다.
그리고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여, 그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우리나라 남쪽 지경에 와서 배를 대고 해변의 백성들과 교역한 지 오래 되었는 바, 지금 우리는 기근으로 재물이 없어 교역하지 못한즉, 왜적이 의식을 얻을 곳이 없게 되면 반드시 도둑질할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 앞으로 뜻밖의 일을 방비할 수 있게 하라고 아울러 발령하소서. 각종 과전(科田)은 3분의 1을 경기 밖의 다른 도에 주되, 수로가 가로막히고 거리가 먼 도에서는 모두 베와 비단으로 거두어 바치게 하되, 혹시 과중하게 거두어 백성에게 큰 해를 끼치는 자가 있으면, 호조가 합당하도록 혜량하여 규정을 정하게 하고, 그 규정을 어기고 과중하게 걷는 자는 소작인으로 하여금 관가에 고하게 하여, 그 밭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무법하게 거둬 받는 문(門)을 막도록 하소서. ... 임금이 이에 좇아 베와 비단으로 받는 것은 그들 스스로 원하는 바에 따라 그 지방의 시가로 바치게 하되, 어기는 자는 수령으로 하여금 꼼꼼하게 따져 조사하게 하였다.“(⟪세종실록⟫즉위년 10/3)
상소로 올라온 내용이지만 매우 구체적인 시행책들이다. 세종 1년 2월에는 다시 연이은 흉년을 걱정하며 굶어 죽는 백성이 없도록 잘 살피라는 교지를 내린다.
교지를 내리기를,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요즈음 수한풍박(水旱風雹, 물난리와 가뭄 그리고 큰바람과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고독(鰥寡孤獨,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젊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知印, 지방관의 관인을 보관하고 날인의 일을 맡던 토착인에게 주었던 특수 관직)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 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한 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의 굶어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 받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고 한결같이 그 경내의 백성이 굶주려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매우 구석진 마을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벌을 줄 것이라."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1/2/12)
세종 5년에는 몇 년째 이어진 물난리나 가뭄 때문에 농민의 삶이 어렵다는 원성이 많아 상소가 올라온다.
(유민에 관한 사간원의 상소문)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신들은 일찍이 들으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이란 백성들이 하늘같이 의뢰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나간 몇 해 이래로 물난리와 가뭄이 서로 거듭되어 백성이 그 본업을 잃었사오나, 특히 임금님의 구제하시는 은혜에 힘 입어 겨우 굶어 죽음을 면하였던 것입니다. 올해는 비록 흉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백성들이 남은 저축이 없어 벼이삭을 부셔서 이어 먹으니, 그 생활이 몹시 고생스러운데, 이제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 손실을 조사할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원)은 환자곡(춘궁기인 봄에 농민에게 빌려주고 추수기인 가을에 이자와 함께 갚도록 하던 곡식)의 완납을 독촉하고, 수령은 전세의 미수(未輸)를 독촉하여, 한 백성의 문간에 독리(督吏, 세금을 독촉하는 아전)가 많이 몰려들어 소란을 일으키니, 민간에 일이 많은 것이 이미 이와 같거늘, 또 경차관을 보내어 유민을 색출하는 것입니다. ... 신들의 우려하는 바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변까지 미치지는 아니할 것이고, 다만 우선 먹고 살기가 어려운 백성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우선 이 행동거지를 정지하고 오는 가을을 기다려 민생을 편케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세종실록⟫5/11/3)
먹고 사는 형편이 나빠지면 민심마저 흔들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세종도 위급한 사태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국정을 조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감사 김세민에게 때가 놓치고 않고 파종하도록 유서를 내리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가만히 듣잡건대, 경기도 각 고을에서 벼슬아치들의 집에는 곡식 종자를 내어 주지 않고 있으므로 종자를 뿌리는 일이 때를 잃을까 심히 염려된다 하오니, 내주도록 하시기를 청하옵나이다." 하니, 임금이 ... 곧, 이어서 씨를 뿌린 상황을 살피게 하고서, 곧 임금의 명령서를 감사 김세민에게 내리기를, 밥은 백성의 하늘이니 농사는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온갖 곡식의 심고 뿌리는 것이 각각 때가 있는 것이니, 때를 만일 한번 놓치면 한 해 내내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도내에 파종(播種)이 이제 절반도 지나지 못하였다 하니, 생각하기를 절기 망종(芒種)이 아직 멀므로 그때까지는 괜찮으리라 하여서 이같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 지금같이 빗물이 넉넉할 때 망종(芒種)이 멀었다고 하여서 농사의 권장을 급히 하지 아니함은 심히 불가하니, 경(卿)은 알아서 속히 농업을 권장하여 때를 잃지 않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29/4/15)
세종의 당부는 즉위 초나 말기인 29년에도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때 농사에 관한 특별한 당부였다.
(알림: 지난 6월 13일의 ‘간행언청’의 글과 11월 14일의 글 제목이 같아졌습니다. 제목은 같을 수 있겠으나 인용한 실록의 내용도 같아졌습니다. 비록 두 글을 써나간 진행은 다르지만, 내용이 같아진 점, 독자들의 넓은 이해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