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에서 대정전이 발생한 소식은 국내 언론에서도 모두 보도되었다. 보수 언론의 대표 격인 조선일보는 2025년 4월 30일 <재생에너지 탓인가... 스페인 대정전 미스터리>라는 제목 아래 아래와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4월 28일 두 나라 전체에 걸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전기로 움직이는 도시 기반 시설 대부분이 멈추면서 사회 전체가 순식간에 멈췄다. 수십만 명이 전차ㆍ지하철 등에 갇혔고, 도로에선 신호등이 꺼져 큰 혼란이 벌어졌다. 비행기 이착륙에 차질이 생겼고, 휴대폰과 신용카드 결제는 먹통이 됐다.
정전은 스페인 기준 낮 12시 33분(한국 시각 오후 7시 33분)에 갑자기 발생했다. 스페인 마드리드·바르셀로나, 포르투갈의 리스본·포르투 등 대도시를 포함한 모든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 남부 일부 지역도 영향을 받았다. 전력은 10여 시간이 지나서야 순차적으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바쁜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기사를 다 읽지 않고 제목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끝까지 읽어보면 대정전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목만 읽어보면 “재생에너지가 문제가 있구나”라고 재생에너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미디어오늘’이라는 주간지를 구독한다. 미디어오늘은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회 문제를 조명하는 주간지다. 미디어오늘 2025년 5월 9일자 기사의 제목은 <스페인 대정전이 재생에너지 탓? '원전 친화' 언론의 노림수>다. 미디어오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최근 스페인ㆍ포르투갈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를 놓고 스페인의 높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에 정전 원인을 돌리는 듯한 보도가 이어졌다. 아직 정전의 정확한 원인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제목들이 재생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경제 신문들은 스페인 대정전 사태를 어떻게 보도하였는가? 제목만 보면 대부분 대정전이 재생에너지 때문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국경제(2025/4/29)
<대정전에 교통ㆍ통신ㆍ금융 마비…재생에너지 편중이 화 키웠나>
매일경제(2025/4/30)
<재생에너지 한계 보여준 것?…'올스톱' 스페인 대정전 원인은>
일부 언론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전 사태를 엉뚱하게도 탈원전과 연결했다.
서울경제(2025/5/1)는 사설 <남의 일이 아닌 스페인 대정전... 전력망 리스크 완벽히 대비해야>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서 한발 물러서면서도 원전 증설을 중단하고 태양광ㆍ풍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선 후보도 ‘탈원전 포기’를 명확히 선언해 에너지 안보에 협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문화일보(2025/4/30)는 사설 <재생에너지 過의존 위험성 보여준 스페인 大정전 사태>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원전 증설에 반대하고 태양광ㆍ풍력 확대를 주장한다.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릴 필요가 있지만, 안정적 에너지원인 원전 증설도 망설여선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보수 언론들은 스페인 대정전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자세를 벗어나 의도적으로 야당의 원전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언론사의 사설이니까 한쪽을 편드는 주장을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유력 외신 가운데 이번 정전 사태를 다루며 원전을 강조한 제목은 찾기 힘들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정전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확인된 것들>(2025년 4월28일), <스페인과 포르투갈, 대규모 정전의 원인 조사 중>(2025년 4월30일) 등의 기사를 냈다. 4월 28일자 워싱턴포스트(WP) 기사 제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규모 정전 사태 발생>이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스페인에서 대정전이 발생했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는 불안하며 탈원전을 중단해야 한다”라는 식의 논리는 성급하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미디어오늘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생에너지가 없을 때도 대규모 정전사태 사례가 있었다. (정전 사태는) 줄여야 하겠지만 완벽하게 피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정전이 발생할 때마다 당시의 주력 전원을 없애야 한다는 건 지나치다. 경제 신문일수록 그런 제목이 나오던데 공포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많은 국민은 언론에 보도되는 기사를 의심하지 않는다. 국민 개개인이 기사의 사실 여부를 일일이 점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언론 보도는 정확하며 공정해야 한다.
미디어오늘 기사(2025/5/16)에 인용된 언론수용자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언론은 정확하다”라고 응답한 국민의 비율이 1994년 52%에서 30년이 지난 2024년에는 33%로 떨어졌다. “언론은 공정하다”라고 응답한 국민의 비율은 1994년 43%에서 2024년에는 34%로 떨어졌다. 언론을 신뢰하는 국민은 3명 가운데 1명에 불과하다. 언론의 위기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언론 자유는 가장 중요한 자유다. “언론 자유가 없으면 다른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언론 자유가 중요하지만, 부정확한 기사를 쓰는 기자의 언론 자유를 보호할 필요는 없다.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은 부정선거 관련 부정확한 기사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였는지 목격하였다.
언론 보도가 잘못되면 옷의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과 같다. 잘못된 기사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잘못된 기사 하나가 수조 원의 예산을 낭비할 수도 있다. 2025년 6월 3일 출범하는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언론 보도의 공정성 확립 방안”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