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얼레빗=손신영 기자] 서울 서북쪽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길에 자리한 갈현동 수국사는 황금절로 잘 알려져 있다. 절의 중심 법당을 금박으로 입혔기 때문이다. 금박으로 입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로, 이 무렵부터 절의 안팎이 정비되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국사의 외형만 보면, 전통사찰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 사찰에 갖추어진 해탈문, 천왕문 등 통과의례로 지나는 문이 생략되어 있고, 중심 불전인 대웅전의 좌우에는 명부전이나 관음전이 자리하지 않는다. 이런 가람배치로 인해, 수국사가 현대 들어 지어진 곳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수국사는 우리나라 절 대부분이 그렇듯,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건물은 새것 혹은, 좀 오래되었어도 100년 이내의 것이지만, 절의 역사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서울 근교의 절집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절들이 속속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서울을 비롯하여 근교의 절집 역사는 지방의 절집 보다 짧은 곳이 대부분이고 이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불교를 억압한 정책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때 혼동하면 안 되는 사실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불교를 억압하기는 했지만 말살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불교는 조선시대 유일한 종교였다. 불교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부합되지는 않았지만, 정책적으로 타도의 대상이거나 응징의 대상은 아니었다. 유학자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도(邪道)로 보긴 했어도, 불교는 유교 통치논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대상 즉, 왕이 아니었던 왕의 생부(生父), 세자였지만 어린 나이에 죽은 경우, 왕의 어머니이지만 계통상 어머니라 할 수 없는 인물 등, 유교의 종법상 종묘에 배향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논리와 물리적 공간을 제공했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없앨 수도 없는 ‘필요악’으로 여겼을 것이다.
▲ 수국사 전경 |
수국사의 역사가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다. 수국사의 역사는 조선초기의 정인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정인사는 조선후기 들어 모든 기록에 수국사로 표기된다. 이에 대해 이능화는 “正因寺後爲守國寺” 라 하였다.
수국사는 원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가 죽자 경릉(敬陵)을 조성하고 인근에 능을 돌보는 사찰로 조성된 것이다. 절의 초창기에는 단 하나의 능을 살피고 제를 올리는 준비를 하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에 덕종의 동생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두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 차례로 조성되면서 수국사는 한계에 도달했다.
여러 능을 살피고 제사를 올리는데 모든 노동력이 집중되어야 했던 것이다. 관리를 파견하여 능(陵)을 돌보게 했지만, 때때로 천도재를 비롯한 불교식 재를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살피고 일기에 따라 살피고 관리하는 일을 능참봉 혼자서 다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그 결과, 1793년(정조 17)에는 건물이 낡고 승려는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때 고양군수 오재광이 서오릉의 재향을 위해 수국사 건물을 새로 짓고 승려를 모집할 것을 주청(奏請)하자, 정조는 전국에 방을 붙여 수국사에 주석할 승려를 모집하게 했다. 역을 면해주고 필요한 양식을 대주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수국사에 주석할 승려를 선발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수국사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 서오릉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일들은 적은 숫자의 승려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802년에는 서오릉 국내의 창릉과 홍릉 담당으로 진관사가 지정되기도 했지만 승려들을 수국사에 머물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수국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또 다시 폐사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다시 정비되게 된 계기는 순종의 발병이었다.
고종은 세자 순종이 병이 나자, 승려들에게 ‘병이 낫기를 비는 기도를 하라’고 주문했다. 마침내 세자의 병이 낫자, 고종은 기도를 봉행했던 승려 3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다. 두 사람은 고향마을의 원님이 되기를 원했지만, 월초거연스님은 폐허가 된 절의 중창을 원했다. 그 결과 수국사는 1900년, 처음 절을 만드는 것처럼 조성되었다.
그러나 수국사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오래가지 못해, 지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국사의 승려들은 탁발하거나 밥을 사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사실이 궁궐에 알려지자, 다시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왕실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두 일회적일 뿐이었다.
수국사가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는 이름에 맞게 지원을 받고 그 역할을 하는 궤도에 올랐던 시기는 1907년으로 보인다. 1907년은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 억압받고 있던 조선의 딱한 사정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했던 바로 그해이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이역만리까지 밀사를 파견할 당시 고종은, 아들의 병이 낫길 간절히 기도해주었던 월초 거연에게 또 다시 부탁했던 것 같다. 기도의 힘으로, 불력(佛力)으로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고, 이 일로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황은 1907년 한 해 동안 수국사에 조성 봉안된 13점의 불화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사찰에, 13점이나 되는 불화를 한꺼번에 봉안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무언가 급박하고 아주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일이 헤이그밀사 파견이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외교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어찌해볼 수 없다는 점을 고종은 감지했던 것 같다. 한 두 점도 아니고 13점이나 불화를 봉안케 하면서, 일의 성공을 얼마나 간절히 바랬을까.
일의 양상을 보면, 대체로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고, 그 이면에서 많은 성과들이 나오곤 한다. 고종이 바랐던 것은 바로 이런 이면 효과를, 불교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 같다.
풍전등화(風前燈火) 같던 조선말기의 정치적 상황은 불교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 다시 한 번 타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사그라져 가는 조선왕실의 염원을 담은 불사(佛事)가 소소하게 이뤄졌던 시기가 바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이다. 그 양상은 서울과 경기일원의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평구 갈현동 수국사는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고종의 절박한 염원이 담긴 그런 곳이다.
손신영 동국대학교대학원에서 한국불교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불교건축을 주로 연구하며, 건축의 물리적인 변화나 의미뿐만 아니라 건축의 인문적인 배경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모든 조형물은 사람이 만들기에,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