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호심 기자] 기억하고 있습니까? 청춘 시절에 들은 그 그리운 멜로디! 이번엔 1960년경 미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교댄스 및 댄스리듬으로 대단히 빠른 기세로 세계적인 유행춤이 되었던 '트위스트' 입니다.
1950년대 맘보·스타일의 붐 이래,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리듬의 개척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최대의 성공을 거둔 리듬은 1960년에 등장한 트위스트 붐일 것입니다. 양 다리를 약 30센치 정도의 간격으로 열어, 무릎을 가볍게 굽혀 히프를 금방 다른 곳으로 비틀어 움직이면서 있는 대로 록큰롤 리듬에 맞추고 허리를 흔드는 단순 명쾌한 댄스입니다.
▲ 음반에 등장한 트위스트의 매력, 60년대는 트위스트가 세상을 장악했다.
특히 1960년 리듬앤블루스 가수 처비 첵커(Chubby Checker)가 '더 트위스트'란 노래를 이런 몸짓으로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참고로 이는 식당의 종업원이었던 처비 체커가 삶은 감자를 밟아 비비면서 착안한 춤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서로 떨어진 채 자유롭게 손발을 흔들고 몸(어깨·허리·다리)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단순한 트위스트는 큰 유행이 되었으며, 이후 이 춤의 변형인 림보(limbo)와 고고(gogo) 등의 스텝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트위스트 붐은 곧바로 우리나라에도 상륙했습니다. 당시의 클럽에는 허리를 비트는 댄스가 침투해, 처비 첵커의 트위스트(The Twist)나, 벤쳐스 악단의 상하이 트위스트(Shanghied) 등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트위스트로 휩쓸게 한 일대 붐이었습니다. 게다가 음악 감상실에서는 트위스트 대회를 열어 ‘트위스트 왕’을 뽑을 만큼 대단한 기세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 림보로 카프리 섬의 토속리듬을 록리듬과 믹스시킨 것으로서 트위스트 붐과 함께 특히 바캉스 시즌에 해변가에서는 젊은이들이 모여 포타블 전축을 틀어 놓고 긴 막대를 가로로 세우고는 그 밑을 통과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계에는 트위스트 리듬을 사용한 음악들이 미국 팝송의 영향으로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킴'등의 트위스트 풍 노래들의 인기는 트위스트 춤의 선풍과 더불어 젊은 층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그런가하면 트위스트 붐에 편승해 이시스터스의 '울릉도 트위스트'가 나와 골목 안 꼬마들도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 연락선을 타고 가는 울릉도라 뱃머리도 신이 나서 트위스트 아름다운 울릉도…….” 라고 노래하면서 트위스트 춤을 출 만큼 대단한 열기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는 한마디로 춤의 춘추전국시대로서 설프를 위시해 자마이카 리듬인 스카, 와투시, 허클벌, 포니, 훌라이, 트위스트와 유사한 매시드 포테이토, 버드, 저크, 셧건, 덕 등 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우리 국민의 윤리관이 유교에 바탕을 둔 탓인지 점잖지 못하다고 해서 이들 춤들은 기지촌 주변의 미군 장병들에게나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축복 “상하이 트위스트”
▲ 60년대 국내 트위스계를 장악했던 한국 연예계 청바지1호 '트위스트 김', 당시 '트위스트 김'의 인기는 대단했다.
검정 교복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 학생들의 건전한(?) 만남의 장소는 YMCA에서 주최하는 취미 사진이나, 포크 댄스 등이 고작이었지만, 당시 학생들에게 광란의 최첨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트위스트였습니다.
최근 국내 영화 '클래식'에서 Swinging Blue Jeans의 Hippy Hippy Shake에 맞추어 강당의 학생들이 한바탕 신나는 춤판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시절 트위스트 문화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이 전부였던 시절 답답함과 그런 사춘기 때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었던 분출구는 역시 트위스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덧붙여서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나팔바지의 유행도 빼어놓을수 없습니다. 교복 바지의 아래 가랑이를 나팔 주둥이 모양 팍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11인치다 12인치다 어떤 친구는 13인치를 자랑했습니다. 어쩌다 학교에서 소풍이니 수학여행을 가게 되면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하나같이 나팔바지 일색이었죠.
50년대가 맘보바지라면 이제 세상은 나팔바지시대가 온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입은 폭좁은 바지를 입고 나오면 촌놈 티가 났고 여학생들도 피식 웃는 식이었습니다. 유행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학생들 사이에는 '판탈롱 바지'가 대유행이었습니다. 바지 끝 가랑이 넓은 것은 비슷하지만, 판탈롱 바지는 무릎까지는 허벅지에 달라붙고 그 아래부터 쫙 퍼지는 나팔꽃 모양새였습니다. 이 때 젊은 사람들은 남자의 경우 더벅머리가, 처녀들은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더벅머리로 시내 활보하다 걸리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가차없이 가위질을 당하는 판이라 경찰을 피해 다니곤 했습니다.
특히 미니스커트는 가수 윤복희씨가 1967년에 독일 공연 갔다가 귀국하면서 처음 입고 나타난 것인데 빠른 속도로 대중을 파고 들었지요. 당시 여고생들도 집에 가면 교복 벗어버리고 '살짝 미니스커트'를 입고 저녁나절을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춤은 무조건 트위스트였는데 소풍가도 트위스트, 당일치기 합동 하이킹을 가도 트위스트, 혹은 캠프파이어에 둘러싸여 놀 때도 트위스트, 어디 가도 트위스트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청춘을 구가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른들 또한 사교댄스 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트위스트에 밤새기 일쑤였지요. 미국의 비평가 M. 사발은 트위스트를 독특한 엉덩이와 다리 동작은 물론 ‘한쪽 발로 가상의 담배를 비벼 끄면서 가상의 수건으로 엉덩이를 닦는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트위스트 시대의 주역들!
▲ 트위스트 붐을 일으킨 처비 첵커(Chubby Checker) 의 음반 표지
트위스트의 출현에 의해 새로운 10대들의 댄스 선풍이 소용돌이 쳐 일어났던 시대, 그 주연 배우는 무엇보다도 트위스트의 왕 처비 첵커(Chubby Checker) 입니다. 그의 대표곡 '더·트위스트'는 1960년에 크게 히트되어 연간 탑 10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트위스트·붐에 의해 '더·트위스트'는 다시 차트를 뛰어 올라 또다시 1위를 하게 됩니다.
처비 첵커는 60년대에 신종 댄스 '트위스트'를 온 세상에서 유행시킨 흑인 가수이지만, 사실 그의 노래는 블랙뮤직 특유의 촌스러움은 없고 매우 달콤하여, 백인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대호평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붐의 발화점이 된 'The Twist'를 시작으로 'Let's Twist Again', 'Twistin USA', 'Slow Twistin'' 등 등, 그의 히트작은 거의 '트위스트' 작품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트위스트물의 영화도 여러 편 찍었다니 얼마나 그 인기가 굉장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트위스트 춤의 인기는 곧 많은 트위스트 아티스트들의 범람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그룹과 가수들로는 Twist And Shout를 부른 이슬리 브러더스(Isely Brothers), The Peppermint Twist를 부른 'Joey Dee & The Starliters', Twistin' U,S,A의 대니 앤 더 주니어스(Danny&The Juniors), Twistin' The Night Away의 샘쿡(Sam Cooke) 등등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가수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습니다.
▲ 우리불리 투위스트, 투위스트왕 등이 수록된 "이것이 트위스트다" 음반 표지 |
끝으로 “학창시절에 함께 추웠던 잊지 못할 상하이 트위스트,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 속의 사랑의 트위스트”로 시작되는 노래로 트로트 가수 설운도씨가 불러 화제가 되었던 '사랑의 트위스트' 가사는 꼭 그 시절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노랫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고무적인 것은 요즘 신세대들도 노래방에 가면 이 노래를 한번쯤 불러보았을 만큼 상당히 좋아 한다고 하지요. 발라드나 힙합 등 가사가 빠른 정신없는 노래를 좋아하는 10-20대 세대가 기성인들과 함께 흥얼거린다는 사실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걸 보면 노래란 부르기 쉽고 흥이 나면 멜로디의 유행에 상관없이 지속성을 가지고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바로 그런 현상이겠지요. 진정한 유행가는 유행을 뛰어넘는 유행가라고 생각 듭니다, 그것은 이미 고전이고 세대를 초월하여 대중의 뇌리 속에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 김호심 : 대성음반 문예부에서 근무했으며 가요114 PD로 활동하며 추억과 함께하는 가요와 팝송을 많이 소개하였다. 현재는 인간문화재 이생강 선생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으며 국악음반을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