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한성훈 기자] “만 스물네 살의 청년 권기일은 국치를 당해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노비를 해산하고 재산을 처분하였다. 그리고 1912년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아준 조부모님을 고향땅에 남긴 채 끝내 아내와 딸 동생과 새어머니의 대가족을 이끌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만주 땅으로 떠났다.” 김희곤 교수는《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에서 추산 권기일 선생의 만주행을 그렇게 표현했다.
추산 권기일(1886-1920, 34살로 만주에서 순국) 선생은 안동 권 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후예인 가징(可徵)공의 10대째 장손으로 대를 이어야 할 종손이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벼슬이 통훈대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안동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코자 만주로 먼 길을 떠났는데 그 뒤를 이어 추산 선생도 1912년 3월 만주로 떠났던 것이다.
▲ 할아버지 권기일 선생 손자 권대용 씨는 85년 만에 중국땅을 밟아 할아버지가 순국한 곳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만주에서 선생은 초대 국무령이던 이상룡, 만주의 호랑이로 불리는 김동삼 선생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경학사에 몸담았다. 이어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의 지역 대표인 구정(區正)과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되는 동포사회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독립자금을 수송하다가 1917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들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보복으로 1920년 일본군이 동포사회를 짓밟았으니 이를 경신참변이라 한다. 이 와중에 선생은 1920년 8월 20일 길림성 유하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으니 망명한지 8년만이고 선생의 나이 34살 이었다.
▲ 독립지사를 많이 배출한 안동인들의 만주 이주 경로
“일본군은 김동만을 총살한 뒤 다시 칼로 목을 베었지만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 머리가 덜렁 거렸다.(중략)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던 권기일의 참살 장면 역시 김동만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학살에 대해 선교사 Martin S. H, Foot는 “피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 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였다” -《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94쪽-
한편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 안동땅에는 두 종류의 구국 항쟁이 펼쳐졌는데 하나는 자정순국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이 그것이다.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나라가 무너져가자 목숨을 던져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선비들이 나타났다.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비판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곧 생명을 끊는 투쟁이다. 이를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 한다.
▲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추산 선생의 유품
안동지역에서는 1908년 풍산 오미마을 출신이자 풍산 수동에서 살던 김순흠이 가장 먼저 자결하겼다. 이후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안동 유림들의 자정이 이어졌는데 향산 이만도 선생도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일제의 무단강탈에 목숨을 던져 자정순국한 인물 90명 가운데 10명이 안동 출신인 것만 봐도 안동지역의 우국충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은 망명지 중국으로 떠나 구국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었다. 191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집중된 망명은 내앞마을(川前里)의 협동학교 관계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초대 대통령(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백하 김대락과 일송 김동삼 등이 그들이다. 권기일 선생 역시 이들의 뒤를 따라 만주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 노비를 40명이나 두던 부자로 수확한 곡물을 기록한 수곡대장, 추산 선생은 이러한 조상의 땅을 모두 팔아 만주의 독립자금에 보탰다.
황량한 불모의 땅에서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참살당하기 전까지 8년간을 오로지 경학사와 부민단, 한족회로 대변되는 한인동포 사회에서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군자금 수송과 독립군기지를 뒷받침 할 수 있는 탄탄한 동포사회 건설과 운영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1920년 8월 15일 34살의 아까운 나이로 신흥무관학교 근처 수수밭에서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어 순국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안동지방에서 관직과 학문이 끊이지 않고 당대 상당한 재력을 갖춘 명가(名家)는 독립운동의 길로 발을 들이는 순간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했다. 단란하던 가족이 흩어지고 후손들은 대를 이은 고난의 가시밭길 속에서 허우적대어야 했다.
▲ 독립운동으로 재산과 부모를 잃은 후손은 간장 장사로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1969.8. 신동아)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결코 패배의 한숨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었으리라.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사실을 훈장처럼 가슴에 새기며 시장바닥에서 리어카로 간장 장사를 지탱해 오면서도
그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삶을 정리한 책이《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 김희곤 지음, 선인출판사》이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추산 권기일 선생과 그 후손들이 겪은 비극을 되새기자니 글쓴이의 마음 또한 저릿함을 느낀다.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은 당하지 말아야 하는데 요즘 일본 극우파의 날뜀이 못내 걱정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