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이윤옥 기자] 고구려 약광왕을 모시는 사찰 성천원을 나와 발걸음을 재촉한 곳은 승낙사(勝樂寺) 불장원(佛藏院二)이다. 이 절 역시 성천원과 같이 고구려 중 승낙에 의해 지어진 절이다. 부랴부랴 고마가와역(高麗川驛)을 빠져나와 세이부이케부쿠로선을 타고 도코로자와(所澤)까지는 순탄하게 갔는데 문제는 도코로자와에서 지선(支線)으로 갈아타면서 발생했다.
단희린 씨의 《일본에 남아있는 고대조선, 日本に残る古代朝鮮》에 소개된 대로 찾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혼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역주민이라고 해서 그 지역의 지리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철도역에 근무하는 직원이라 해서 유서 깊은 곳을 다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하루였다.
▲ 승낙사 본당. 마치 신사처럼 보인다. |
나중에 알고 보니 니시도코로자와에서 한 정거장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불장원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전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그것까지는 지역 주민들의 잘못된 길 안내 탓이라고 하겠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바쁜 탓에 비싼 택시를 타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지출이 생긴 점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도코로자와역의 역무원이 자신 있게 가르쳐 준 곳이 그만 불발로 끝나 인적도 없는 도로변 편의점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점원에게 복사비 100엔을 내고 건네받은 그 지역 약도를 보니 우리가 찾던 불장원이 약도 한 끝에 동그마니 나와 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 이런 것이던가!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작은 동네 약도에 절과 신사가 점점이 숱하게 산재해 있어 주민이라 해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안내해줄 수 없을 터였다.
지나가는 택시도 없어 편의점 점원이 건네준 콜택시회사에 전화를 한 뒤 기다리는 20여 분 동안 어쩔 수 없이 회원들은 편의점 건물로 올라가는 차가운 시멘트 계단에 그대로 앉아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기로 했다. 이역만리 고구려 땅을 떠나 낯설고 물 선 무사시노 허허벌판에 짐을 내리고 삶의 터전을 가꾸었을 조상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우리가 콜택시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다만, 오늘 불장원까지 들려야 일정이 끝나고 다음 일정이 틀어지지 않는 것이었을 뿐인데도 조바심이 일어 안절부절 했는데 그 옛날 조상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안정된 생활을 했을 터이니 얼마나 가슴 졸일 일이던가! 불장원 앞에 택시를 내려준 운전기사는 돌아갈 때도 자기네 택시를 이용해달라고 했지만 지리를 익혀버린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모두 지척에 있는 전철을 이용했다.
원래 이 절의 이름은 승낙사 불장원으로 분명히 절인데도 절 경내에 들어서서 마주친 본당은 꼭 신사 본전 모습을 하고 있다. 명치정부 이전 일본의 절과 신사는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경내에 불전과 신사본전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한다. 그러나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신정부는 부처를 모시는 불교를 신사 경내에서 내쫓는 이른바 훼불정책을 쓰게 되고 이때 수많은 절이 수난을 당하게 된다.
▲ 승낙사 지붕 귀퉁이마다 노란 금박의 “卍”로 이 건물이 절임을 표시하고 있다. |
▲ 승낙사였음을 알리는 주춧돌(왼쪽), 이 절은 현재 불장원으로만 불리는데 주차장에는 불장원이라고만 쓰여있다. |
명치유신 이전까지 절과 신사 이름을 함께 쓰던 곳에서 “寺”란 간판을 폐하고 “神社”만을 쓰도록 했던 것이 악명 높은 명치정부의 불교탄압이다. 가나가와현의 오이소(大磯)지방에 있는 고려사(高麗寺)도 간판을 내리고 고려신사(高麗神社)로 남게 되지만 고려라는 말조차도 쓰지 못하고 고래신사(高來神社)라는 한자를 쓰고 발음도 “다카구진쟈”로 바꾸게 했다. 이것은 일본 전국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이타마의 고마신사(高麗神社)는 그나마도 이름 보전을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당수 출가승은 하루아침에 승복을 벗고 신사에 종사하는 궁사로 변신해야 했으며 유서 깊은 절의 범종들은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시기 대포알을 만드는데 녹여 나갔다는 기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혹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국보급 범종이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은 채 대포알이 되어 우리 동포를 겨냥하지는 않았을까? 대자 대비한 부처를 몰아낸 죄일까? 일본은 2차 대전 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으니 부처의 법력(法力)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 승낙사 불장원 석비(위)와 간략한 유래를 적은 누리집 자료 속에는 관동일대에 조선인들이 건너왔다는 말이 선명하다 (아래) |
일본 땅에 불교를 전하고 절을 지어주고 불상과 경전 등을 전해줌은 물론이고 학식 높은 승려를 직접 파견하는 등 이른바 물적, 인적 자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 남긴 불교 유적지는 비교적 오랫동안 보존되어오다가 그만 근세의 명치정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는 불운을 겪게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불장원 경내에는 어른 양팔 길이만 한 석비가 가로로 세워져 있다. 절의 유래가 적힌 기념비이다. 대략 살펴보면 “이 절의 창건은 나라시대인 7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는 사야마저수지 공사로 인해 수몰되어 없어진 승낙사마을(勝樂寺村)에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오신지(王辰爾)일족이 아미타여래와 환희불(歡喜佛)을 모셨으며 이는 고려산 승낙사 성천원을 건립한 시기에 해당된다.
그 후 가마쿠라시대와 에도시대에 화재가 잇따랐으며 현재의 모습은 1819년에 재건된 모습이다. 1929년 사야마저수지 담수 전에 절 건물 일부를 현재의 터로 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고 전한다. 한편, 조선에서 건너온 오신지(王辰爾) 일족을 왕인박사 후예로 보는 설도 있으나 단희린 씨는 《지명사서,地名辭書》를 들어 이들이 아야씨(漢系) 곧 백제나 신라계 주민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왕 약광을 따르고 흠모하던 사람들은 그러고 보면 반드시 고구려유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구려계는 물론이고 백제, 신라 출신의 백성이 모두 그를 따랐을 뿐 아니라 약광이 죽은 뒤에는 여기저기에 그를 추모하는 절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니시도코로자와(西所澤)에 있는 승낙사 불장원도 고려산 성천원과 함께 고구려왕 약광을 추모하고 그려보기에 좋은 곳이다.
▲ 불장원 들머리(입구) 게시판에 붙어 있는 명언 한 구절(위) “지구와 인연은 둥근 것, 돌고 돌아 현재가 있다”(아래) |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불장원 경내는 개미 한 마리 없이 고요하다. 본당을 뒤로하고 좁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니 절 입구 게시판에는 얌전한 붓글씨체의 일본어 명언이 적혀있었다.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 그대로 내 몸을 지켜주는 힘이 되나니.”
옛 고구려 조상들은 비록 타국일지언정 정성을 다해 내 몸처럼 이웃을 보살피지는 않았을까? 오늘날 도쿄의 전신인 무사시노 벌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토호세력들과 조화를 이루려면 화목의 덕목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남을 공경”하라는 명언을 써 붙인 지금 불장원의 승려는 어쩌면 천삼백여 년 전 이 절을 지은 승낙스님의 정신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우리 조상들이 온갖 노력과 정성을 쏟으며 살다간 고구려의 땅 사이타마현은 그래서 더욱 한국인들에게는 정겨운 곳이다. 저녁 땅거미가 어스름한 승낙사 불장원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일행은 1,300여 년 전 고구려왕 약광과 그 후예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글쓴이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찾아가는 길*
불장원(佛藏院) :고구려 약광왕을 기리는 절
신주쿠 - 세이부선 니시도코로자와(西所澤) 역에서 10분 거리
* 다음 <4>에서는 고려산 아래 다카쿠신사(高來神社)을 소개합니다.
*자료인용 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