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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에 남의 무덤, 격쟁으로 해결

[파주문화통신 16] 정조, 격쟁사건 4천 건 넘게 해결

[그린경제=권효숙 기자조선시대 전기에는 억울한 일이 있거나 민원을 올릴 때 신문고를 울려 조정에 알리는 제도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를 대신하여 상언(아랫사람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임금에게 민의를 직접 호소하는 수단), 격쟁, 와언(유언비어를 퍼뜨림), 괘서(이름을 숨기고 글을 써 정부를 비난), 산호(산에 올라가 욕지거리를 하며 읍정을 비판) 등을 이용하여 민원을 제기하였다.

이 중에 격쟁은 백성들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대궐 밖을 나올 때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눈과 귀를 집중시킨 다음 억울함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수단으로서 이 격쟁을 가장 잘 받아들인 임금이 정조이다.

   
▲ 정조의 화성행차도.정조는 이러한 행차시에 백성들의 격쟁을 많이 받아들여 해결해 주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과 아버지 융릉을 다녀오는 행차에서 수많은 백성들의 민원을 현장에서 접수하고 처리했는데 자그만치 재위기간 24년 동안 4427건이나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정조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는지 알 수 있겠다.

정조는 자신을 호위하는 호위대 밖에서 격쟁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과 행차시 어가 앞에서 문자로 호소하는 가전상언(駕前上言)을 적극 받아들여 가능하면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였다.

격쟁을 함에 있어서는 사건의 내용에 대해 네 가지 제한이 있었는데 이를 사건사(四件事)라 하여, 사형당할 처지. 부자관계 밝히기. 정실첩의 자식 가리기. 양인천인 가리기 등이다.

그러나 후에 다른 내용도 취급하게 되어 신사건사(新四件事)라 하였다. 이는 사건사 외에 아버지할아버지를 위한 것. 처가 남편을 위한 것. 동생이 형을 위한 것. 노비가 주인을 위한 것. 그밖에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격쟁할 수 있었으니 결국 대부분의 내용이 다 다뤄진다고 하겠다.

격쟁을 하면 우선 형조로 끌려가 추고를 받은 후 그 내용을 형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고, 임금은 이를 한성부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파주 헤이리마을의 옛생활박물관에 가면 파주시 향토자료 제1호가 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5(1781) 고양군에 있는 박이중(朴履中)의 선산에 서울 박종묵(朴宗默)이 몰래 투장(다른 집안 선산에 몰래 자기집안 묘를 쓰는 것)을 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임금에게 직접 격쟁을 하면서 그 처리과정을 기록한 격쟁문서이다. 

 

   
▲ 사건과 관련된 총 16건의 문서가 이어져 있다.

이 문서의 격쟁사건은 1781년 윤5월 초순 안동에 사는 박이중이 밖으로 거동하였던 임금에게 격쟁을 하였고 이에 박이중은 형조로 끌려가 추고를 받은 후 그 내용이 10일 형조에서 임금에게 보고, 임금은 한성부에서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한성부에서는 윤513일 이 사건을 조사하라는 공문을 경기감영으로 보냈고 경기감영은 다시 교하군으로 공문을 보내 처리하도록 하였다.  교하군은 윤518일 사건의 조사내역을 다시 감영에 보고하였고 감영에서는 투장을 한 박종묵에게 해당 묘소를 이장 할 것을 명하고 29일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어 62일 교하군에서는 묘소가 있는 고양군으로 해당 사건을 이행할 것을 통보하였으며 결국 투장을 한 박종묵은 10월 초순에 이장할 것을 약속하게 되었고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약속기일인 1010일이 되어서도 박종묵은 이행하지 않고, 더욱이 불이행에 대해 죄를 묻기 위해 찾아간 담당관을 위협했다는 사실이 한성부에 의해 다시 임금에게 보고되자 임금은 이에 대해 거듭 엄히 시행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의 상황은 일성록정조510월조에 기록되어 있다.

 

   
▲ 투장된 묘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넣기도 했다.

1020일 이 사건은 다시 형조로 내려갔고 형조에서 박종묵을 추고하여 이장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때의 추고에서 박종묵은 고의가 아닌 아들의 혼인으로 인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변명하였고 1024일 박종묵은 고양관에 11월 초순까지는 이장하겠다고 이를 문서로 남겼다. 결국 그 약속은 1127일 이행 되었다. 

이 사건은 분묘 1기의 이전 요청에 관한 건으로 반년 이상이 걸리고 임금이 두 번이나 사건의 해결을 지시한 후에나 결말이 난 사건이며 사건이 어렵게 해결된 만큼 격쟁자였던 박이중 측은 이러한 판결 이후로도 효력이 지속하고 차후 유사한 사건에 대한 방지를 위해서 한성부에 해당 사실에 대한 전후 과정을 문서상으로 남길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며 한성부는 요청을 받아들여 해당문서를 발급한 것이다.

 

   
▲ 문서에는 관아의 직인과 수령의 서압(사인)이 보인다.

이 격쟁문서의 내용은 산송분쟁으로서 조선 후기 소송사건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이다. 산송은 풍수적으로 좋은 남의 명당 자리에 자손의 발복을 위해 몰래 자신의 선친 묘를 조성하는 일 때문에 벌어지게 되는데, 빈번한 산송 분쟁 중에서도 파평 윤씨 문중과 청송 심씨 문중의 윤관 묘와 심지원 묘에 관한 산송이 가장 유명하다.  

해외토픽에 오를 만큼 몇 백년간을 이어온 두 문중의 산송 분쟁은 격쟁 정도로는 해결이 안될 중요 사안이었고 결국 250여 년이 지난 2007년에 합의가 이루어져 해결된 사건이었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