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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지동맹으로 항일투쟁, 최순덕선생 타계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시험거부 투쟁 이끌어

[그린경제=정석현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백지동맹 사건의 주역이었던 최순덕 애국지사가 22일 오전 10시경 올해 103살로 세상을 떴다. 

   
▲ 103살로 세상을 뜨신 최순덕 애국지사, 광주학생운동 때 "백지동맹"을 이끌며 항일투쟁을 했다.

1911년에 태어난 최순덕 애국지사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여고보(현재의 전남여고) “백지동맹투쟁 사건의 주역이다. 그때 3학년 재학 중으로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최순덕 애국지사는 113일 광주역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가전이 벌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치마폭에 돌을 나르며 남학생들의 시위대에 전달하는 등 반일시위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그때의 시가전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 통학열차에서 일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이 도화선이 돼 일어난 것이다. 

최 여사는 이날 대규모의 시위 과정에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체포·구속되자, 이에 반발해 1110일부터 치러질 예정이었던 중간고사를 전면 거부하는 백지동맹으로 일제에 온 몸으로 항거했다. 

최 애국지사는 전날 밤 동급생과 함께 구속학생 석방과 조선 독립을 위해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고 연필도 들지 말자는 내용의 백지동맹 호소문 150여 장을 밤새워 만들었다. 최 애국지사는 시험 당일 날이 밝자 마자, 학교에 가서 호소문을 책상 안 서랍에 넣는 방식으로 이날 있을 거사를 미리 알렸다. 이어 1교시 시험이 시작되자 각급 교실 연단을 일일이 돌며 투쟁을 호소했고, 이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 교생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답안지 제출을 거부했다. 

아울러 전교생은 곧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무려 1주일 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항의 농성을 벌였다.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투쟁은 당시 유교적 사고가 지배한 사회에서 연약한 소녀들이 일제에 맞서 벌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싸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 광주학생운동은 일본 학생이 조선여학생 댕기머리를 잡아당긴 데서 시작되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 사건으로 최순덕 애국지사는 1930년 광주여고보 최초의 강제 퇴학생이 됐다가 1954년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피다를 펴낸 이윤옥 시인은 최순덕 애국지사의 타계 소식을 듣고 아직 선생님의 시도 쓰지 못했는데 벌써 가시다니 이로써 저는 선생님께 죄를 죄었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아직 정부로부터 훈포장도 받지 못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또 한분의 여성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뜨셨으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슬프고 슬플뿐입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 애국지사는 슬하에 이재민 전 광주시 부교육감과 이재균 치과 원장 등 61녀를 두고 있다. 빈소는 서구 쌍촌동 한국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며, 발인은 24일 오전 9시다. 장지는 담양 천주교묘역이다. 

연락처 062-380-3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