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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종 명창 출생지에 기념관을

동편제 판소리 전북 순창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2

[그린경제=양병완 기자]  조선 후기에는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하여 공연되는 무대가 많이 나타났다. 소리 광대에 의하여 흥행되어지는 판소리가 그 중에서 대표되는 것이었다. 유진한의 만화집(晩華集), 1574에 따르면 18세기에 이미 춘향가(春香歌)가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 19세기 중반에 따르면 19세기 중엽에 춘향가” “심청가” “박 타령” “토끼 타령” “적벽가” “배비장전” “강릉매화 타령” “옹고집전” “변강쇠 타령” “장끼타령” “무숙이 타령” “가짜 신선타령등 열 두 마당의 판소리가 형성되어 공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판소리는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판소리의 삼 요소를 제대로 갖춘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만 여섯 마당이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을 가인(歌人) 신재효 선생께서 판소리 사설(辭說)을 정리하여 이론적으로 확립시켜 놓았다. 

판소리는 18세기의 영조, 정조시대에 우춘대 명창, 하한담 명창, 최선달 명창이 적극적으로 활동 하였다. 19세기 전에는 권삼득 명창, 모흥갑 명창, 송흥록 명창 등 여러 명창이 새롭게 나타나서 기존의 판소리에 새로운 내용(內容)의 사설(辭說)과 판소리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노랫말과 가락을 새롭게 짜고 구성하여 부른 대목을 더늠이라고 하는데 이들 더늠가락은 후대의 명창들에 의하여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때에 판소리는 지역적으로 특징을 나타나게 된다. 섬진강 동쪽 남원과 운봉, 구례, 고창 흥덕, 순창을 중심으로 하는 동편제(東便制) 판소리와, 서쪽과 남쪽지역인 전남 광주, 보성 나주, 완도, 진도, 해남을 중심으로 서편제(西便制) 판소리가 발달하게 되었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혼합한 소리인 충청도 지역 판소리가 중고제(中古制)로 발달하게 되었다. 

고종 무렵인 19세기 후반에는 김세종 명창, 김정근 명창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명창들이 활동 하였으며 이때부터 후학들에게 전수(傳受)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19세기 말부터 조선의 판소리는 기본적인 기반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 때 호남지방과 충청지방에서 활동하던 기악 명인들은 시나위 가락과 판소리의 가락을 악기의 리듬에 실어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산조란 판소형 장단에 판소리형 선율을 얹어서 연주하는 독주곡

산조(散調)란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의 순서대로 3-6개의 판소리형 장단에 판소리형 선율(旋律)을 얹어서 연주하는 독주곡(獨奏曲)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산조(散調)가야금(伽倻琴) 산조(散調)”거문고 산조” “대금(大琴) 산조” “해금(奚琴) 산조를 탄생시킨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최근에는 아쟁 산조” “피리 산조” “호적 산조(散調)”도 연주 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운봉 만석꾼 승지 박정규(1875~1942)(왼쪽), 나주 영장을 지낸 운봉 만석꾼 승지 박정규의 아버지 박준지(1844년~1911년)(오른쪽)

그러나 아쉽게도 피리 산조나 호적(새납, 날라리, 태평소) 산조를 단독으로 공연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산조(散調)는 어느 장단이나 반드시 고수(鼓手)의 장구 장단이 뒤따라야만 한다. 산조를 맨 처음 연주한 악기는 가야금인데 조선시대 말기에 김창조(金昌祖,1865-1929) 명인이 제일 처음 창작 발표를 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한숙구 명인의 가야금 병창” “백낙준 명인은 거문고 산조한숙구 명인, 박종구 명인은 해금 산조를 창작하고 구성하여 공연하였다. 이시기에 각각 독특한 산조를 창작하고 연주하여 많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산조는 지역에 따라서 사사계보(師事系譜)에 따라서 여러 개의 류파(類派)로 나누어 전수(傳授)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심방곡(心方曲)”이라는 곡이 공연 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조와 덧붙여 비슷한 말이 가야금, 해금, 대금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방곡(心方曲)은 때로는 시나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나위라는 말은 신라(新羅) 시대(時代)사뇌(詞腦)” “사내(思內)”가 변한 것이다. 이것은 향토(鄕土) 소리또는 향악(鄕樂)”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 중기(中期)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의미의 산조는 심방곡(心方曲)” 또는 신방곡(神房曲)”이라는 의미로 널이 쓰였다. 조선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서남 지역의 무가(巫歌) 선율(旋律)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악기의 산조곡을 가리키게 되었다. 대금, 해금, 피리, , 징 등으로 합주를 하던 시나위를 제외하고 공연하였던 시나위에 여러 가지 종류의 소리와 조(調)를 다양하게 구성을 하여 연주를 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와 같이 악기로 판소리형 선율을 연주하던 것으로 봉장취라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소리들은 즉흥적인 선율이 많았다. 이것이 발전하여 현재의 산조가 된 것이다. 한편에서는 사당패가 출현하여 전승되는 선소리 산타령은 조선 말기에 전문적인 소리꾼 집단에 의하여 공연 되었다. 소리꾼이 되지 못한 일반 서민들은 육자배기와 잡가를 많이 불렀다. 


동편제 소리는 운봉, 흥덕, 구례, 순창 지역에서 발달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는 송흥록 명창, 정춘풍 명창, 권삼득 명창의 법제를 뿌리로 하여 운봉, 흥덕, 구례, 순창 지역에서 발달되었다. 이러한 지리적이며 지역적인 구분 방법은 후대에 와서 동쪽과 서쪽 가객들이 서로 자주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커다란 뜻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화를 할 때 호령(號令)을 한다거나 호걸(豪傑)스럽게 의사를 표시할 때에는 어세(語勢)가 강렬(强烈)해지고 활발해지는데 판소리에서 이와 같은 흐름으로 소리하는 것이 동편제라고 할 수 있다. 

동편제는 통성과 우람찬 우조(羽調)를 중심으로 하며, 가락을 위주로 하여 장단을 구성한다.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을 구사하는 것이 동편제의 특징이다. 동편제는 소리가 웅장하고 소리마디마다 억센 힘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성의 시작이 매우 중요하며 신중하다. 가사 내용의 구절구절마다 끝마침이 쇠망치로 쇠를 자르듯이 명확(明確)하고 상쾌한 것도 특징이다. 소리는 자주 붙이지 않고 길게 쭈우욱 펴며 슬픈 계면조(界面調) 가락을 거의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동편제 소리는 고담하고 소박하며 깊은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편제 소리처럼 기교와 수식이 없다. 호령하듯이 내지르기도 하고 큰 걸음을 내딛듯이 거뜬거뜬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장단도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대마디 대장단이라고 한다. 리듬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잉애걸이 등 붙임새를 곁들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발림보다는 소리의 표현에 치중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편제의 판소리는 꿋꿋하고 장엄하며 엄격한 우조가 많고 관운장이 청룡도를 내리치듯이 끝을 맺기도 한다. 판소리의 여섯 마당 가운데에서 동편제 명창들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적벽가와 춘향가 중에서 암행어사 출두하는 대목이다.

   
▲ 지리산 동편제 국악인 공연이 끝난 후 한자리에 모여 기념 촬영한 모습

동편제의 근대 명창으로 권삼득 명창, 송흥록 명창, 박기홍 명창, 김세종 명창, 송만갑 명창을 꼽을 수 있는데, 송만갑 명창은 뒷날 서편제와 가까운 창법을 개척하여 공연하다가 족보에서 제명당했다. 이것은 판소리 법통(法統)에서 유파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판소리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 장단 등 느리고 빠른 여러 가지 장단이 있어서 사설(辭說)에 나타난 긴박하고 한가로우며 여유로운 극적(劇的)인 상황에 따라서 이용되고 있다. 판소리에는 우조(羽調), 평조(平調), 계면조(界面調), 경조(京調), 설렁제, 추천목등 기쁘고 슬프고 평범한 여러 가지 조(調)가 있어서, 사설에 나타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극적인 상황에 알맞게 응용하여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판소리에는 몇 개의 장단과 평조와 우조와 계면조와 같은 몇 개의 조만이 많이 이용되어 왔다.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권삼득 명창, 모흥갑 명창, 송흥록 명창, 고수관 명창, 염계달 명창, 신만엽 명창, 김제철 명창, 주덕기 명창, 김세종 명창들이 오늘날과 같은 판소리의 여러 가지 장단과 여러 가지 조(調)를 응용하게 되었다.  

철종 때에 이르러서는 박만순 명창, 송우룡 명창, 이날치 명창, 장자백 명창, 정창업 명창, 한송학 명창, 김석창 명창을 비롯하여 고종 때는 장판개 명창, 박기홍 명창, 김창환 명창,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김창룡 명창, 정정렬 명창, 김연수 명창들의 전승(傳承)으로 오늘날과 같이 판소리가 크게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가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발전을 하게 되자 대를 이어서 명창이 속출하였다.  

초기에는 명창들의 창제(唱制)와 격조(格調)가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명창들의 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獨特)한 창법(唱法)더늠이라고 한다. 이와 동시에 명창들의 거주지가 다르고 명창을 스승으로 하여 후계자(後繼者)가 대를 이어가면서 자연적으로 유파(類派)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도성(全道成) 명창의 주장을 인용한 정노식(鄭魯湜)이 펴낸 조선 창극사에는 동편제 판소리와 서편제 판소리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동편제가 담담한 채소(菜蔬)의 맛이라고 하면 서편제는 진진한 육미(肉味)의 맛이고, 동편제가 천봉(千峰)에 달이 떠오르는 격이라면 서편제는 일 만개의 꽃나무에 꽃이 만발한 격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우조(羽調)를 주장하였다. 우조라고 하는 것은 판소리의 음성이 뱃속에서 울려 나옴으로 소리가 정중하고 온화하면서 씩씩한 느낌을 주는 판소리 창법을 말한다. 동편제는 이와 같이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청담이라 하여 웅장하고 맑은 소리이며, 그 맛은 담백(淡白)하여 호령조가 많았다.  

김세종 명창은 헌종, 철종, 고종 3대간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명창이었다. 그러나 순창에는 박복남 명창 한분만 외롭게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는 조용하다. 적막감마저 감돈다. 학생들 몇 명이 겨우 겨우 순창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소리꾼이 태어난 집도 없고, 판소리 기념비나 예적비나 판소리 기념동산은 더더구나 없다. 판소리 기념관은 글씨도 없다. 판소리에 대한 연구는 순창 문화원에서 발간한 잊혀 가는 순창의 판소리향토교본 한 권이 전부이다. 9년 전부터 풍물과 민속놀이에 민요, 농부가, 상여소리, 육자배기가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판소리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나는 순창의 판소리 발전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동안 순창의 판소리 발전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동계면 가작리 쑥대미에서 김세종 명창이 살았던 집을 어렵게 찾아낸 것이 고작이다. 순창군에서는 하루 빨리 그 집을 매입하여 김세종 명창 판소리 기념관으로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김세종 명창 예적비와 기념비와 기념 소리북과 판소리 기념동산이 하루 빨리 조성되어서 자라나는 후학들에게 교육의 지표가 되어야만 한다.  

더욱 더 파손되기 전에 보존대책이 세워져야만 할 것이다. 조선시대 헌종, 철종, 고종 3대간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인 명창이며 국창을, 살기 좋은 순창에서 지금까지 이렇게 무시해도 된다는 말인가. “김세종 명창 출생지길 안내판 하나 없는 곳을 타도에서 찾아오는 판소리 문화유적 현장답사 모임을 김세종 명창 집으로 안내 할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다.

과연 나는 순창의 판소리 발전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