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고양문화통신 13]가르치지 않고는 백성을 벌하지 마라

고양 8현으로 존경받는 김정국, 김안국 형제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아버지에게 밥사발을 던지면 죄가 될까, 안 될까? 조선 중종 임금 때 아버지께 밥사발을 던진 백성이 있었다. 중종 13년인 1518년 사재 김정국이 황해감사로 나갔을 때 아비에게 밥사발을 던진 아들이 관가에 잡혀 온 일이 있어 시끄러웠다. 황해감사이던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내가 황해감사로 가 있을 때 연안(延安)에 백성 이동(李同)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와 말다툼이 일었는데 그만 아비에게 밥사발을 던져버렸다. 이웃사람이 이를 보고 아들을 잡아서 내가 있는 감영(監營)으로 보내왔다. 그런데 이 자가 추국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죄를 자백한 것이다. 나는 죄수에게 너의 죄는 사형이 마땅하다. 너는 부자간이 하늘과 땅의 위치요 임금과 신하의 자리란 것을 모르느냐? 아비가 없으면 어찌 네 몸뚱이가 있겠느냐? 따라서 부모를 잘 모시면 효자가 되고 욕하거나 구타하면 악역이 되는 것이다. 너는 밥사발로 아비를 때렸으니 땅이 하늘을 범한 것이나 다름없고 신하가 임금을 범한 것과 같다. 법에 비추어 사형이 당연한 고로 내가 너를 사형에 처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죄인이 말했다. "저는 아비에게 밥사발을 던진 것이 사형에 이르는 죄인지 몰랐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형죄인지 알았다면 추국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었을 일이지 제가 자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실상 아비의 소중함이 하늘과 땅의 관계인지는 몰랐습니다. 평소에도 아비와 서로 다투다가 욕을 하기도 하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에야 아비의 자리가 이렇게 높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관찰사님께서 저에게 벌을 주지 않으신다면 이후부터 마땅히 아비를 잘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정국은 ‘“가르치지 않고 형벌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니 이는 바로 백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비록 천성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저절로 능히 깨우치리오. 옛적에 덕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질서를 잡고 춘추를 읽고 백성을 가르친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말하고는 스스로를 반성하여 곤장을 쳐서 사면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비로소 법을 집행하는데 외길로만 고집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말이다.

이는 사재 김정국의 인품을 잘 나타내는 일화로 그가 5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까지 한 일은 일편단심 백성의 교화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관리로써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가하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황해감사 시절에 쓴 백성교화용 책이 경민편(警民篇)이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110년이 지난 효종 7(1656)에 다시 펴내 백성들의 교화서로 쓰게 된다 

   
▲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3번지에 부인과 쌍분으로 조성된 김정국 무덤(경기도 문화재자료 122호, 사진 파주문화원 제공)

이에 대한 효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효종 17, 7(1656) 728일 기사에는 경민편(警民篇)은 바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김정국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편집한 것입니다. 본도 백성들의 습속이 미련하고 무식하므로 정국이 이 책을 지어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것도 펴내 반포하도록 하소서.”라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고 임금은 윤허했다. 

백성 사랑하기를 끔찍이 여겼던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김정국은 의성(義城) 김씨로 호는 사재(思齋)이다. 김안국(金安國)이 친형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0살과 12살 되던 해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향(趙有享)에게서 자랐다. 25살 때인 1509(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이조정랑,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고, 34살 때인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삭탈관직 되어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무려 19년을 고양에서 은거하며 후학약성에 매진하다가 53살 되던 해에 부름을 받고 전라도관찰사로 내려가서는 십수조(十數條)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 정책을 건의, 조정에 반영하게 하였다. 편민거폐란 백성에게 과다한 불필요한 악습을 시정하는 건의를 말한다 

   
▲ 사재 김정국의 문집 사재집 표지와 본문

그러나 과로로 인해 이때부터 몸에 병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그의 위민(爲民) 마음은 쉴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능력과 백성사랑 정신을 높이 사 2년 만에 또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임명하게 된다. 55살 되던 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경상도에 가서도 마을을 직접 순시하는 등 열과 성을 다하여 전라도에서와 같이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몸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병환이 깊어 57살 되던 중종 36(1541)년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중종실록 36(1541) 520일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신은 논한다. 김정국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溫醇)하고 일생 동안 처사를 모두 순리대로 하였으니 군자다운 사람이다. 그 명망이 그의 형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나, 실은 혹 더하기도 하다. 전에 사림(士林)의 화()를 만나 물러가 살던 20여 년 동안에 가난하기가 상사람과 같았으나, 끝내 산업을 일삼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므로, 문생(門生제자가 늘 자리에 차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마쳤을 때에는 서로 앞 다투어 와서 빈소(殯所) 곁에서 곡하고 조석으로 제전(祭奠)을 모시고 상여가 나가고서야 흩어졌으며, 가난한 가운데에서 힘을 다하여 밑천을 만들어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혹 심상(心喪) 하는 자도 있었으니, 거의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 김정국 신도비(사진 파주문화원 제공)

김정국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양(高陽) 시골집에 돌아와서 호()를 은휴(恩休)라고 짓고 19년을 지내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는데 형과 아우 모두 학문이 깊고 우애가 깊어 당시 사람들은 이들 두 형제가 세상에 흔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이난(二難)이라 불렀다. 형 김안국이 아우 김정국에게 보낸 시 한 편을 보자
 

은휴와 은일은 뜻이 서로 같으니 / 恩休恩逸意相同
(은휴는 아우 김정국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 은일은 형 김안국이 지은 정자)
아우는 호수 서쪽에 있고 형은 동쪽에 있어도 / 弟在西湖兄在東
임 향한 일편단심 너와 내 없이 / 拱北丹心無彼此
때때로 영주/봉래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 時時稽首向瀛蓬

자네 쉬면서 진정 임금 은혜 감사할 / 子休正感君恩重
내 편함도 또한 (임금) 은혜일세 / 我逸銜恩亦復然
백년을 편히 쉬는 동안 할 일이 무엇인고? / 休逸百年何所事
태평가 부르며 임금께 감축하고 춤이나 추세 / 衢謠華祝舞堯天 (맨뒤 해설 1 참조)

그러자 김정국은 형에게 답한다. 

영화도 안일도(임금의) 은혜입기는 매한가지 / 芬榮休逸被恩同
형제가 동서로 나뉜들 우애를 걱정하랴! / 敢恨鴒原西隔東
한가히 늙을수록 깊은 뜻을 깨쳐가니 / 閒到暮年尤覺味
작은 봉래산은 도리어 속세에 있다오 / 人間還有一壼蓬

아우 한가롭고 형은 편하여 남은 원이 없으니 / 弟休兄逸餘無願
행하고 멈춤을 어찌 다 계연에게 물으리까? / 行止寧同問計然
서로 오가며 시골에 은일함을 자랑하고 / 來往相誇休逸外
은혜 잊지 말고 태평천하를 길이 노래하지요. / 銜恩長頌太平天

쉬는 아우의 마음 형처럼 편안하니 / 休弟心情同逸兄
한집에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냅니다. / 一窩安樂送餘生
한가한 삶에 임금 은혜가 중함을 다시 깨우치니 / 居閒更覺君恩重
임금의 은혜가 벼슬과 영화만이라고 말하지 마오 / 莫說君恩只宦榮 (맨뒤 해설2 참조)

 

   
▲ 김정국의 형 안국의 글씨

형과 아우 모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9년이란 긴 세월을 각기 낙향하여 지내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을 닦으면서 우애를 다지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57살에 숨진 김정국의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세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현재는 없다.  

김정국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己卯黨籍)》‧《사재척언(思齋摭言)》‧《경민편(警民篇)등이 있다.  

한편 형인 모재(慕齋) 김안국(1478~1543)은 중종 때의 대학자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밝고 시문에도 능하여 많은 글을 남겼으며 벼슬은 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문경(文敬) 시호를 받았다. 김안국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주 이포로 내려가 범사정(泛槎亭)을 짓고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였고, 이웃한 장흥사(長興寺)와 신륵사(神勒寺) 등의 명승지로 노닐며 유유자적하였다. 

   
▲ 형 김안국의 위패를 모시는 기천서원(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26-1, 문화재청 제공)

이같은 인연으로 여주군 이포리 수부말의 뒷산 구릉 가파른 곳에 김안국의 부조묘가 세워지게 되었다. 정면 3, 측면 1칸의 규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로 앞쪽 처마에 모재선생문경공부조묘(慕齋先生文敬公不祧廟)”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그 좌측에 문경공묘우기(文敬公廟宇記)”라는 기문이 달려 있다. 부조묘(불천위不遷位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함) 주위에는 곡담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용어해설
1

1)은휴(恩休)와 은일(恩逸) : 쉬는 것도 임금의 은혜요 편안함도 임금의 은혜라는 뜻.
2)서호(西湖) : 일명 전당호(錢塘湖) 중국 절강선에 있는 명승지, 십경(十景)의 하나. 여기서는 형이 사는 집을 서호에 비유한 것
3) 공북(拱北) : 공신(拱辰) 뭇별이 북극성을 에우고 있듯 임금의 덕화에 귀향(歸向)
4)영봉(瀛蓬) : 신선이 사는 산, 영주산(瀛州山)과 봉래산(蓬萊山) 예로부터 발해(渤海)에 영주산, 봉래방장산(方丈山)이라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믿었다.
5)구요(衢謠) : 강구연월 문동요(康衢煙月聞童謠)의 준말
옛날 요()임금이 거리에 나가서 동요를 들었다는 말로 태평성대를 구가 한다는 뜻.
(6
)요천(堯天): 요임금과 같은 성천자(聖天子)

 
용어해설 2

1)분영(芬榮): 꽃다운 영화
2)영원(領原): 형제간의 우애 은 할미새 령
3)(): 도리어 환
4)일호(一壺): 작은 규모, 원래는 호로병 하나라는 뜻, : 봉래산(蓬萊山)의 준말
5)행지(行止): 행하고 멈춤
행실, 품행, 주선, 처리, 여기서는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난다는 뜻 인 듯(?)
6)계연(計然): 춘추시대 월()나라 사람,  계산에 능하고 부국강병책을 건의 했다.
7)일와(一窩): 하나의 움집, 는 움집와, 별장와
8)환영(宦榮): 벼슬과 영화 . 벼슬의 영화로움.

*한시에 대한 번역과 자문은 전북 남원의 소병호 한학자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