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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 뿌리내린 성씨들 (3) 교하노씨

파주문화통신 (23)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교하 노씨(交河盧氏)의 시조는 노오(盧塢)이다.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로 건너온 노수(盧穗)의 둘째 아들로서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다.  교하노씨세보》에 따르면 오(塢)의 후손 강필(康弼)이 신라 말에 ‘기계’라는 곳에서 살면서 학문이 뛰어나 문명을 떨쳤고, 관향을 장산(章山)으로 옮겼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에 오르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교하(交河)로 복관(復貫)하였다고 한다.

 

   
    ▲ 교하노씨 파주문중에서 노사신의 시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교하로 삼고, 강필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의 기초를 다졌다. 노씨는 선대의 묘가 주로 개성에 있어 고려 때까지는 개성에 머물다가 조선에 들어와 파주로 옮긴 듯하다.

   
    ▲ 교하노씨 공숙공파의 시제지내는 모습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 2세손 안맹(安孟)이 동서면병마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醇)은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쯤 되는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뒤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는 등 가문을 중흥시켰다.
 

   
    ▲ 파주 재실 효사재

영순의 세 아들 중 탁유(卓儒)는 형부와 공부상서를, 지유(智儒)는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져 신창 노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효돈(孝敦)은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이후 7세조인 연(演)이 은청광록대부 북계병마사를 거쳐 지제고를 역임하였고, 9세조인 영수(頴秀)는 이부상서를 제수받고 당대 최고 권력자의 한 사람인 평양 조씨의 사위가 되었다.

 

   
    ▲ 노사신의 시제 때 후손들이 음복하고 있다

영수의 아들 척(𩑠)은 아버지가 조인규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부원세력으로 성장하여 왕실의 경녕옹주와 혼인하여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딸이 원나라의 순제비(順帝妃)가 되었으나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연루되어 기철(奇轍) 등과 함께 제거되었다.

교하노씨는 척의 네 아들을 파조로 하는데, 제(濟)의 후손이 서원군파(瑞原君派), 둘째 진(稹)의 후손이 창성군파(昌城君派), 은(訔)의 후손이 경원군파(慶原君派)이고 영(渶)의 후손이 신양군파(新陽君派)로 나누어 진다.

교하 노씨는 고려 말 대원관계를 둘러 싼 빈번한 정변에 연루된 자가 많아 가문의 성공과 침체의 변동이 심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파주 염씨와는 달리 계속해서 벼슬길에 오름으로써 가문을 드높였다.

 

   
▲ 파주 백석리 교하노씨 공숙공파의 중시조인 노한의 묘. 노한은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 동생과 혼인하여 태종과 동서간이다.

 진(稹)의 손자 한(閈 1376~1443)은 파주의 입향조로서 교하 노씨 공숙공파의 중시조다. 아버지는 대리경 균(鈞)이며 좌의정 민제(閔霽)의 사위로 부인이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으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며 묘는 파주읍 백석리에 손자 사신(思愼), 증손 공필(公弼)의 묘와 함께 있다. 

   
▲ 파주 백석리에 있는 노사신 묘

노한의 손자 중 보진재(葆眞齋)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은 고려에 이어 조선초기에도 가문의 번영을 이어갔다. 세종과 성종대의 명신 노사신은 돈령부사 물재(物載)의 셋째 아들이며, 한(閈)의 손자로서『경국대전』의 <시전(尸典)>을 편찬했고,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으며,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과 『여지승람』을 편찬하여 눈부신 업적을 남겨 가문을 빛냈다.
 

   
▲ 노사신의 신도비. 훼손을 막기 위해 보호시설을 해놨다.
   
▲ 노사신의 신도비 비문

 

 

 

 

 

 

 

 

 

노사신의 첫째 형과 둘째 형은 각기 원주와 금천, 즉 시흥으로 옮겨갔고 노사신의 6세손인 20세(世) 신걸(信傑, 1500-1550) 때 교하 송촌리 약산으로 이주하였다.

사신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공필(公弼)은 성종 때 6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그 외 직(稷)은 임진왜란 때 병조참판으로 왕을 호종(扈從)했고, 정유재란 때는 접반부사로 명나라와 병사(兵事)를 논의했다.
근래에는 12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가문의 이름을 알렸다.

   
▲ 노공필 묘역 문인석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의 한강변 언덕에는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인 효사정(孝思亭)이 있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으며,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흑석동 한강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에 그 자리에는 한강신사(일본의 신사로, 웅진신사라고도 하였다)가 있었다. 효사정은 예로부터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고,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나다.
 

   
    ▲ 노사신이 어머니를 그리워해 세운 효사정

 교하 노씨는 교하읍 송촌리 새터골 마을에 노신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후 80 여호가 살았으나 요즘은 15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입향조 신걸의 묘는 맥금동에 있으며 이곳 선영묘역에는 150여기의 교하노씨 후손 묘가 있다.

1912년 공릉천 정비사업으로 송촌리를 돌아 구불구불 흐르던 강을 곧게 펴고 주위를 메꿔 논으로 개간하고 난 후 갈현리. 송촌리. 약산굴(법흥리), 연다산리 등에 넓은 논이 많이 생겼고 이 때 이 논을 소작하려고 송촌리에서 살던 교하 노씨들이 약산굴로 많이 넘어가 살았다.

법흥리 약산굴 마을에는 현재 교하 노씨가 20여 호 살고 있고 송촌리에는 15호 맥금리에 3호, 금촌에 5집. 탄현면 대동리에 2호, 만우리에 3호 정도가 살고 있다.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에 의하면 교하 노씨는 전국에 총 16,561가구, 53,203명이, 파주시에는 176가구 5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