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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총각 복만이 전설의 도쿄 심대사 <2>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원삼대사당에는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있고, 전각 주변의 울타리에 사람들의 이름들이 쓰여있다. 아마도 이 절에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이리라. 그런데 그 이름 가운데는 고려이세송(高麗伊勢松), 고려정(高麗精)과 같은 고마(高麗, 고구려의 뜻)씨 가 눈에 띄어 우리는 혹시 한국계 도래인들이 아닌가 하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 그때 운동복 차림의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우리 앞을 지나가다가 한국말을 알아 들었는지 우리에게 다가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그러면서 울타리에 있는 고마(高麗, 고구려의 뜻)씨 이름을 가리키며 심대사 주변에는 고대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었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을 가네코(金子)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조상도 고구려 후예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가네코씨는 심대사 근처에 살면서 점심을 먹은 뒤 한 번씩 절 경내를 산책하러 온다면서 “어디에 고구려 지명이 많습니까?”라고 묻는 우리에게 미다카시(三鷹市) 시청 뒤쪽에 가면 많다고 목에 힘을 주며 알려준다.

   
▲ 고려이세송(高麗伊勢松), 고려정(高麗精)과 같은 고마(高麗, 고구려의 뜻) 씨가 눈에 띈다.

 이 때문에 귀갓길에 우리는 심대사를 다 보고 나서 헛걸음치는 셈치고 미다카 시청 건물까지 버스로 한 이십 여분 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는데 아저씨가 말하는 곳과 우리가 찾는 곳이 일치가 안 되었는지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분명히 심대사 일대에 고구려 후예들이 살았던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비단 심대사 주변뿐이 아니라 가나가와현 오이소(大磯)에도 주택가 주소판이 몽땅 고려(高麗)였던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대사의 유명한 메밀국수도 먹었겠다, 한국계 큰 스님인 원삼대사님도 만나보았겠다 이제 심대사에서는 한 곳만 더 들려 나가기로 했다. 원삼대사당을 내려가면 석가당이라고 하는 통유리 불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봉불(白鳳佛, 650~654)이 모셔져 있다.

   
▲ 운동복 차림의 아저씨 뒤 돌 울타리에 고마(高麗)씨를 가리켜주면서 미다카시청 뒤에도 고려라는 지명이 많으며 자신도 고려씨 후예라고 말하는 가네코(金子)씨

중요문화재인 이 불상은 1909년 원삼대사당 밑에서 발견되었으며 나라시대(奈良時代) 작품으로 관동지방에서는 몇 안 되는 오래된 불상이다. 젊은 청년을 연상시키는 얼굴과 아름다운 옷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일본 불상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라고 <일본위키피디어> 사전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건너갔거나 한반도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대 한반도로부터의 전해진 일본의 불교 전래는 단순히 경전만을 주고 온 것이 아니며 초기에는 불상을 가져갔지만 절 짓는 법을 배워 가면서 불상 조각 기술도 전수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유리 안쪽으로 침침한 불빛 속에서 우리를 바라다보고 계시는 불상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에 우리가 비춰지고 있는 듯했다.

저 부처님은 이쪽에 일본인과 함께 서 있는 우리를 알아보실 수 있을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니까. 관동지방 최고(最古) 부처님께 우리는 한일간의 우정을 기도하고 조용히 경내를 빠져나왔다. 심대사만 보고 가면 더 여유 있게 천천히 둘러봐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고하쿠신사(虎狛神社)와 복만교(福滿橋)를 찾아봐야 했다.

   
▲ 한반도불상으로 추정되는 백봉불

나중에서야 복만교가 심대사 본당 산문(山門)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처음에는 바로 가까이에 두고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절 입구에서 간이 메밀국수집에 들러 물어본 게 큰 실수였다. 마침 국수집 아저씨가 밖에 나와 서 있길래 절 어딘가에 있다는 복만교를 물어보았다. 국수집 아저씨는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 심대사 반대편에 나있는 길을 가리키며 곧장 20여 분 정도 걸어가면 노가와라는 강이 있는데 거기에 복만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충청도 총각 복만씨와 낭자의 전설을 기념하여 만들었을 복만교를 찾아보는 기쁜 마음에 아저씨가 가르쳐준 언덕길을 단숨에 달려가다시피 해서 노가와 강변에 이르렀다. 멀리서 보니 다리 하나가 보인다.

복만이 다리 찾느라 헤매

아! 복만씨 다리인가보다. 그러나 다가가서 보니 “하쿠바다리”라고 쓰여있다. 눈을 돌려 좌우를 살피니 아뿔싸! 백여 미터 간격으로 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된 영문인지 길가는 사람 서너 명을 붙잡고 물어본 후에야 복만교는 심대사 산문(山門) 들어가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맙소사! 심대사 경내에서 국수 장사를 오랫동안 했을 아저씨가 복만교도 모르고 엉뚱한 다리를 가르쳐 줄 줄이야. 하지만, 그것은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찾던 고하쿠신사가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커다란 은행이나 체육관 같은 건물은 찾기 쉽지만 작은 신사나 복만교 같은 다리는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바로 자기 동네 근처에 있는 것도 무관심하기에 길을 물을 때는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물어야 한다. “모른다.” “그런 거 이 동네에 없다.”라는 말을 하더라도 끈질기게 여러 사람에게 물어야 목적하던 곳을 찾을 수 있는 경험을 여러 번 했던 터라 길 찾기엔 이골이 나버렸다.

   
▲ 최근에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는 고하쿠신사의 요모조모

 가지고 간 자료대로라면 고하쿠신사(虎狛神社)가 나와야 할 텐데 쉽사리 눈에 안 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간혹 지나치는 사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한참을 노가와라는 작은 강변에서 서성거렸다. 잠시 후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운동을 나온 것인지 저쪽에서 걸어온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하쿠신사”를 물었다. 남자가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여자가 호주머니에서 손전화를 꺼내더니 고하쿠신사를 찾는다.

손전화 길찾개(휴대전화 네비게이션)인가보다. 그들은 손전화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의논하는 듯하더니 이내 알려준다. “저기 나무가 우거진 곳 보이시지요? 거깁니다”하고는 길을 재촉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헤어진 곳에서 얼마 가지 않아 고하쿠신사는 그 초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경내의 아름드리나무만이 고하쿠신사가 오래된 곳이라는 것을 말해 줄뿐 맨땅이 드러나고 땅이 쩍쩍 갈라져 신사 경내는 사람 발자국이 전혀 없는 폐허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고하쿠신사사(虎狛神社)의 유래는 충청도 온정리에 사는 총각이 일본에 건너와 일본호랑이 처녀와 결혼하여 어여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을 복만이라는 고구려계 총각이 사랑하여 둘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결국 둘은 결혼에 성공하여 후에 만공상인이라는 큰스님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고구려 총각 복만이의 사랑이야기가 서린 복만교와 그 위를 지나는 사람들

그래서 훗날 심대사를 창건한 만공상인은 호랑이 할머니를 뜻하는 호(虎)와 고구려 할아버지를 뜻하는 박(狛)을 각각 넣어 지은 고하쿠신사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하쿠신사와 심대사가 세워져 있는 곳은 조후시(調布市)로 《신풍토기(新編風土記)》에는 간무천황 때인 799년 목화씨가 처음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때까지 백성이 면포(綿布)짜는 기술을 몰랐다고 하며 다마천(多麻川) 부근에 사는 광복(廣福)이라는 사람이 면직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일본 목면의 시작으로 조후시(調布市)의 유래는 여기서 비롯된다.”라고 쓰여 있어 충청도 온정리의 우근(右近)이라는 사람이 이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텅 빈 신사 경내를 한참이나 서성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시 우리는 복만교를 찾으러 심대사로 향했다. 버스정류장 바로 뒤가 산문 입구이고 산문을 채 가기 전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다리라고 하기엔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작은 것이었다. 작은 도랑 위에 놓인 다리는 1,300여 년 전의 복만 씨와 고하쿠신사의 부부가 낳은 어여쁜 딸과의 사랑을 나눈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다리다. “복만교(福滿교)”라는 한자로 된 글자가 선명한 다리를 기념하여 세운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 다리를 만들었을까? 일본의 처녀와 한국 총각이 결혼하여 잘살게 되었다는 전설은 참으로 듣기 좋다.

공연히 다리를 왔다갔다 여러 번 하면서 우리는 이들처럼 한일 관계도 좋아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거나 과거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왜곡하여 한반도를 잘살게 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억지는 이제 제발 멈추기를 바란다. 오늘의 일본을 살찌우게 한 사람들이 고대 한반도이었다는 문헌과 기록을 우리보다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게 일본 아닌가?  

관동의 오래된 절 심대사와 오미쿠지의 창시자 원삼대사, 큰스님 만공상인의 조부모 사당 고하쿠신사와 이들이 들어서 있는 조후시(調布市) 등은 우리 조상들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밝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지 일본사람들이 밝혀내어 널리 알려줄 리가 없다. 오히려 있는 것을 감추고 없애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런 기대는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숙소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무사시노 평야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집들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해가 지고 온 세상이 어두워지면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초원 위에 펼쳐지던 평야와 그 평원 위를 달리던 용맹의 상징 고구려 후예들과 뛰어난 선진문화의 전달자 백제와 신라인들의 영원한 로망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비손한다.  

 

★찾아 가는 길★

JR미타카역(三鷹駅) 남쪽 출구로 나와 3번 버스승차장에서 심대사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