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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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적 복수주의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 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코자 함에 있다
우리들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표상인 것이다.
-6.10 만세 격고문 가운데서-
*권오설 (1899∼1930) 독립투사는 누구인가?
사회주의운동가. 별명 김형신(金亨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일본 유학생으로 1923년 7월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로 개칭)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화요회를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에는 김찬(金燦)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의 사전조직인 코르뷰로 국내부에 참여, 조선노농총동맹의 당 야체이카(細胞)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17일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실제로 활동한 분야는 조선공산당의 방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였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다음날 서울박헌영(朴憲永)의 집에서 동아·조선·시대일보 대표, 서울과 지방의 각 청년회 대표, 노농총동맹 대표 등 18명이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여기에서 7명의 중앙집행위원중 1명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1월 제1차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사건)으로 책임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조봉암(曺奉岩) 등이 해외로 망명,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되자 고려공산청년회의 재건에 착수, 12월 중순에 우선 임시중앙간부를 구성하고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그 뒤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에 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계획, 박내원(朴來源) 등에게 선전문 약 5만 매를 인쇄하게 하여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6월 7일 130여 명의 동지들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해체되었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옥사하였다.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