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
본래 대한民으로서
차라리 죽을 지언정
일본民 되기를 바라지 않는 국민이
독립을 외친 것이
무슨 법에 맞는 다는 것인가
-이상동 판결문(고등법원, 1919년 5월 12일)-
*이상동(李相東) 독립투사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51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 일로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2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1921년 출옥한 뒤에도 기독교 전도와 후진교육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제국주의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거부하다가 다시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 일로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2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1921년 출옥한 뒤에도 기독교 전도와 후진교육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제국주의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거부하다가 다시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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