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제에 가열차게 싸웠다. 하지만 1932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국지사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일제를 상대하기에 벅찼기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던 때였다.
▲ 중국 장개석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계기를 만든 윤봉길 의사 |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에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만천하에 응징했다. 윤봉길 의거로 일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이후 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높이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일제를 상대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소련‧미국이 일본과 싸울 때 우리도 함께 싸울 군대가 필요했다.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 막대한 경비가 필요했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 김구 선생은 1934년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 했고,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 중국 중경 가릉빈관 앞에서 찍은 광복군총사령부 창설 기념사진(1040. 9. 17) |
광복군이 만들어지면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었고, 총사령관에는 지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 총무처장에는 최용덕, 참모처장 채원개, 부관처장 황학수,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 훈련처장 송호, 군무처장에 유진동 등이 임명되면서 광복군은 비로소 체계적인 군사조직의 모습을 갖추는데 이후 한국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3개 지대를 편성했으며, 창군 1년 여 만에 3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광복군은 먼저 곳곳에 흩어져 싸우던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 통합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게 됨으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제9전구공작대·토교대를 두게 되었다.
이후 광복군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병력이 점차 늘어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 파괴 공작을 진행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또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태평양 방면에서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은 이것을 기회로 1941년 12월 9일 드디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다.
▲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전 장군 |
▲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이 1945년 2월 무렵 다른 부대로 옮길 때 동료대원들이 조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을 남긴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 |
광복군은 이후 한미합동작전의 일환으로 한반도 상륙을 편성, 진격하려 했으나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이었던 광복군을 미군정은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해방 이듬해 6월 해산됐다.
비록 국내로 진격해서 조선총독부의 항복은 받지 못했지만 광복군은 국군의 뿌리임은 물론 광복군이 있었기에 일제와 당당하게 싸울 수 있었음을 우리 모두 깊이 인정하고 기려야만 한다. 오늘은 광복군 창설 73돌, 우리 겨레는 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