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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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몸이 한번 죽으면
오히려 외로운 귀신이 될 것이나
이 머리는 한번 깎이면
영원토록 오랑캐가 되는 것이니
각자 마음에 맹세하여
대의를 붙잡기 바랍니다
-삼계통문 ‘김흥락, 김도화 외 3인’ 가운데서-
*김흥락(1827-1899) 선생은 누구인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 안동 출신. 김성일(金誠一)의 주손(胄孫). 아버지는 능주목사(綾州牧使) 진화(鎭華)이며, 어머니는 이원상(李元祥)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가려뽑아 ≪제훈집설요람 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李滉)·이상정(李象靖)·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 해 겨울 가정과 사우로부터 보고 들은 바를 모아 ≪곤학록 困學錄≫을 편성하고, <초학잠 初學箴>·<외천설 畏天說>을 지었다.
1850년(철종 1) 친명(親命)으로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였다. 1851년≪학봉집 鶴峯集≫을 중간하고, 그 이듬해에는 ≪가례의 家禮儀≫를 편성하였다. 1854년<졸수요결 拙守要訣>과 <입학오도 入學五圖> 및 <주일설 主一說>을 지었다. <입학오도>에서는 학문의 대요가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의 네 가지에 불과하다고 역설하였다.
1867년(고종 4) 어사 박선수(朴瑄壽)가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경상도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878년 집 서쪽 복병산(伏屛山)에 서산재(西山齋)를 지었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1889년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을 회교(會校)하였다.
1894년 7월 승정원우부승지에 오르고 이 해 8월 영해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한말 영남의 대유학자로 이돈우(李敦禹), 권연하(權璉夏)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사후 소계서당(邵溪書堂)에 입향되었으며, 저서로 ≪서산집≫ 16책(본집 13책, 속집 3책)이 있다. 이 밖에 그의 문하에 출입했던 문인 705인이 등록된 ≪보인계첩 輔仁稧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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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어록 전시장 |
*김도화(1825-1912) 선생은 누구인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菴). 안동 출신. 약수(若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양정씨(晉陽鄭氏)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발표하였다. 또한 안동에 입성한 그는 의병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 안동의 의병 수백명이 모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도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1896년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항의문과 규탄문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저서로는 『척암문집』이 있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