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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풍신수길의 잔학성, 교토 코무덤을 찾아서<1>

귀무덤이 아닌 분명한 코무덤

  1.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들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2.  
  3.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를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 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순절한 민.관.군 만인의사를 합장한 무덤)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1. 돌 치워라 돌 치워라

    1. 봉분 위 돌 치워라
    2. 먼 고향 남원땅 엄니 곁에 나 가리라
    3. 왜놈 칼 맞고 코 잘려 그 길로 왜놈 땅 끌려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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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돌이 애비야 돌이 애비야!
    6. 황천길 아들 찾아 헤매셨을 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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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여보 여보 돌이 아빠 울부짖으며
    9. 지아비 시체 찾아 헤맸을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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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아부지 아부지 어디계셔요
    12. 눈물 흘리며 엎어지고 기어가며 애비 찾았을 피붙이
    13.  
    14. 돌 치워라 돌 치워라
    15. 봉분 위 돌 치워라
    16. 좁은 무덤 박차고 훨훨 날아 내 고향 남원땅으로
    17. 나 돌아가리라        - 코무덤, 이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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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임진,정유재란의 비극을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는 교토 코무덤을  찾아가던 날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불가마 더위로 등줄기에서는 연신 땀이 비 오듯 했다. 교토의 인기 관광코스 33간당(산쥬산겐도, 가마쿠라 시대의 불상 1000여구가 모셔 진곳)에서  어른 걸음으로 백발자국이 될까 말까 한 곳에 코무덤이 있지만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아 그저 적막강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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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봉분 위에 얹은 만행의 현장 교토 코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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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근처는 평범한 주택가로 꽃을 사서 바칠 수도, 음료수 하나 살 만한 가게조차 없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햇살만이 봉분 위를 말없이 비추는 무덤 앞에 서서 우리 답사단은 비명횡사하신 조상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400여 년 전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만 없었더라면 이 무덤의 주인들은 남원 고향땅에서 부모형제와 오순도순 한 평생을 살다 갔으련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목숨을 잃고 코가 잘려 이곳 교토 땅에 와서 묻혀야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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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묵념을 하고 고갤 들어 무덤을 바라다본다. 코가 묻힌 둥그런 봉분 위에 무겁게 내리 누른 돌덩어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커 보인다. 외로운 영혼을 위한 시를 한 수 읊고 나니 답사단원들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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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풍신수길이 외로운 영혼을 위해 만들었다는 돌탑을 어쩌자고 봉분 위에 무겁게 눌러 놓았단 말인가! 조선의 무덤은 물론이요, 일본 천황가의 무덤에도 봉분 위에 돌덩어리를 내리누르는 만행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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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지난 2005년 10월 20일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북간대첩비’를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이 비는 정문부 장군이 3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병 2만 8천을 무찌른 전공비인데 지난 100년 동안 일본 군인을 떠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뒤편에 방치돼 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480킬로그램인 이 비에 무려 1톤의 머릿돌을 얹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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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커다란 돌덩이를 보니 문득 북간대첩비 생각이 떠오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쿄토시의 코무덤 안내판이다. 그닥 크지 않은 안내판에는 ‘귀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무덤’이라고 써놓았다. 딴에는 친절히 한답시고 일본어 설명 밑에 한글로 번역을 해두었으나 코무덤이면 코무덤, 귀무덤이면 귀무덤이지 귀무덤하고 괄호 처리한 코무덤은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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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토시청이 세운 안내문에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쓰고 멋적은지 괄호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고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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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시는 귀무덤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한다. 원래는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의 유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학자의 역사왜곡을 교토시가 용인해준 꼴이다. 그래도 양심에 걸렸는지 귀무덤하고 괄호치고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런 식이라면 대체 이 무덤 속에 있는 것이 귀란 말인가? 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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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무덤을 내려다 보는 자리에는 임진왜란의 원흉 풍신수길을 받드는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있다.

  18.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이 무덤은 코무덤이다”를 외친 이가 있다. 그는 바로《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학민사》를 쓴 고 조중화 씨이다. 그가 평생을 바쳐 오사카성 천수각,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구석구석을 수소문 끝에 찾아다니며 밝혀낸 코무덤의 진실에 대하여 우리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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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고 조중화 씨는 정유재란 당시 풍신수길의 부하로부터 받은 ‘코 영수증’과 풍신수길이 해당 부대장에게 보낸 감사장을 결정적인 증거로 내놓는다. 수많은 문헌과 자료 속에는 풍신수길의 코베기 명령에서부터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날라다 묻은 기록까지 완벽한 증거품이 있다. 그 자료 속에는 어느 한 곳에도 귀라는 말은 없으며 코를 베었다는 기록뿐이다. 따라서 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은 귀가 아니라 분명한 코라고 조중화 씨는 밝히고 있으며 일본 측 문헌에도 모두 코무덤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21. 그런데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9년 8월 20일 자 중앙일보에는 <타국서 400년 조선의 넋, 이제 한 푸시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지난 13일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이사장 한양원)가 그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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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그런가 하면 또 14일 자 연합뉴스엔 <“만행 사과하고파”…‘귀무덤’ 지킨 日노인>이란 기사가 보인다. 기사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왜군들이 조선인 12만 6천여 명의 귀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와 묻어놓은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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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그런가 하면 2007년 10월 1일 자 연합뉴스 기사엔 <임진왜란 귀무덤 400년 만에 안장>이란 제목으로 경남 사천시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 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 6천 명의 넋을 달랬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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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이 행사는 코무덤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온 것인데 17년 만에야 제대로 안치하고 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코무덤이 아니고 귀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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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이 자리에는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 기사를 보면 가키누마 스님은 이제 다 되었다는 뜻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어야 하며, 일본 쪽 가키누마 스님은 뭐가 다 되었다고 했는지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 넘어간 한국측에 궁금증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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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언론의 이런 보도 자세가 오늘날 한국인들로 하여금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이 아닌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시인은 ‘코무덤’이란 제목의 시에서 “코무덤 귀무덤 그게 그 말인데...”라는 말을 썼다. 그게 그 말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일본인의 역사왜곡을 두둔해주는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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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조중화 씨가 생전에 애타게 부르짖었던 코무덤이 아무 보람도 없이 지금까지 귀무덤으로 남아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귀무덤으로 둔갑시켜버렸는데 억울한 조상의 원혼을 달래주지도 못하면서 일본인들의 추악한 모습을 따라해야 하는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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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그렇다면 코무덤이 어찌하여 귀무덤이 된 것일까? 그 왜곡의 루트를 찾아 가보자. 아니 그 보다 앞서 조선인의 코를 베어 나르며 주고 받은 풍신수길의 이른바 ‘코 영수증’이란 것부터 살펴보자.
     
      
    ▲ 코감사장(풍신수길이 코를 보낸 부하 장수에게 보냈다.)
  36. 400여 년 전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 땅에서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 중 “코 베기 명령”의 꼼짝없는 증거품이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베어진 코 영수증이다. 이렇게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선 현지에서 수집된 코는 7명의 관리가 소금에 절여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냈으며 이때 풍신수길은 소금에 절인 코를 손수 세어본 뒤 일일이 해당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37. 수십 장의 코 영수증과 이에 대한 풍신수길의 감사장을 세상에 밝힌 사람은 조중화 씨로 그는 오사카성 천수각에 보관된 코 영수증을 비롯하여 땅 곳곳을 누비며 그들만이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했다.
  38.  
  39.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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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그렇다면 전쟁에 참가한 병사뿐만 아니라 부녀자들 목숨까지 앗아서 코를 베어 간 전대미문의 잔학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토의 코무덤을 지시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바로 풍신수길이란 자다. 그는 코만 베라 한 것이 아니다.
  42.  
  43.  "굶주린 일본군이 식량징발을 위해 산에 숨어 있던 조선인과 전투를 했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눈과 코가 많이 나왔다“(御兵具衆 山より被参候 目鼻も数多い候。海南)" 
  44.  
  45. 이 글은 1597년 10월3일 시마쓰부대에 종군한 승려 멘고렌조보(面高連長坊)의 ≪高麗日記≫에 실린 글이다. 산으로 숨은 조선인들을 뒤쫓아 가서 숨겨놓은 식량을 내어놓으라며 선량한 사람을 죽여 코를 베고 눈알을 뽑은 것이다.(필자주, 일본인들은 조선을 고려라 부르기도 한다)
  46.  
  47.  임진왜란의 명분이 명나라 정복이라면 정유재란은 한반도 남쪽 절반의 점령이 목적이었다고 일본역사는 말하고 있는데 이미 오랜 기간 전쟁에 따른 손실과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대부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건너왔지만 좀처럼 작전 개시를 안 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보내고 있자 풍신수길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597년 6월 15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코베기 명령”을 내리게 된다.
  48.  
  49.  “전라도에 가서 식량을 확보하고 여러 성을 공격한 뒤 충청도로 들어가서 사병 1명당 한 되(升)씩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50.  
  51.   알려진 풍신수길의 잔학성 -소실 죽이기-
  52.  
  53. 소금에 절여 보내온 코를 일일이 손수 세었다는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어디가 끝일까? 잠시 풍신수길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보자.
  54.  
  55. 그는 6살 때 하급무사 출신 아버지가 죽자 재혼해버린 어머니 손에 의해 2년 뒤 광명사란 절에 맡겨진다. 그러나 거친 성격으로 이 절에서 쫓겨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결국 15살에 가출하여 거리를 배회하다 당시 권력자인 오다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 권력에의 야욕을 불태운다.
  56.  
  57. 풍신수길은 24살에 결혼하여 부인 외에 데리고 논 여자가 200명이 넘었다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한 이후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일본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몸소 경험한 인물로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다.
  58.  
  59. 그에 따르면 풍신수길은 교토와 사카이에 사는 반반한 처녀와 과부를 끌어와 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중 한 여자가 몸이 안 좋아 친정으로 보내졌다. 여자는 자유의 몸이 된 줄 알고 병이 낫자 승려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를 안 풍신수길은 질투와 복수심으로 이 여자와 남편을 잡아다가 허리 아래를 흙속에 생매장하여 굶어 죽게 한 뒤 목을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와 유모, 친정어머니를 불태워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60.  
  61. 그뿐만이 아니다.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28세의 조카 히데츠구를 죽이는 장면은 가히 망나니가 날뛰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53살에 얻은 아들이 3살 때 죽자 풍신수길은 다시는 자식이 안 태어날 것으로 단정하고 성급히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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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풍신수길이 57살 되던 해 소실 몸에서 다시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조카에게 심복들과 함께 할복자살을 하도록 명했다. 이어 조카며느리를 포함한 히데츠구 일가와 처첩 4남 1녀의 자식 등 39명을 히데츠구의 목이 내걸린 무덤 앞으로 끌고 가 5시간 동안 처참하게 죽인 뒤 “반역을 꾀한 짐승무덤 <惡逆畜生塚>”이라는 팻말을 내거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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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무덤을 조성하고 세워둔 비석 (비석엔 풍신수길이 불쌍히 여겨 공양하고 코무덤이라 하였다고 쓰여있다. 

  65.  
    이러한 인간말종 풍신수길을 두고 교토 코무덤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가증스러운 글이 쓰여 있다.
  66.  
  67.  “1597년 풍신수길은 일본 장병에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중략) 장병이 적의 목을 베어야 하나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냈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 지었다.” ( 1597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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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이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相國寺) 주지 쇼다이에 의해 쓰인 것으로 풍신수길을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스런 장군”으로 왜곡한다. 또 조선인의 코를 벤 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라 일본군 병사의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벌어진 양 거짓표현하고 있다. 풍신수길의 잔인성으로 볼 때 코무덤이야말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장군의 “영원한 힘의 과시”로 남기고 싶은 그릇된 욕망일 뿐 결코 비명횡사한 조선인을 안타까이 여기고 한 짓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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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신수길 심복조차도 “코무덤”이라 했는데 “귀무덤”이라고? 
  1. 명백히 상국사 주지 쇼다이는 “코무덤”이라 밝혀두었는데 이것이 “귀무덤”이 된 까닭은 풍신수길 뒤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의 23살 브레인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잔인하다. 귀무덤으로 완화해서 부르자!”라고 한데서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한 교토시 표지판만 잘 살펴봐도 본래 이 무덤이 귀무덤인지 코무덤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2.  
  3. 코무덤 이야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찾아 가는 길>

JR교토역에서 시영버스 100번, 206번, 208번을 타고 산쥬산겐도(33간당)에서 내려
도요쿠니진쟈(풍신수길 신사) 쪽으로 50미터쯤 걸어가다 왼쪽 소공원 끝에 있다. 

*코무덤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윤옥, 김영조 공저《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2010》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