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까닭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귀베기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97년은 풍신수길이 교토에 통한의 “코무덤”을 만든 지 400주년 되는 해였다. 그 400주년을 맞아 교토 코무덤 앞에서는 추도식이 열렸다. 이어서 임진왜란과 코무덤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날의 토론회를 일본어판으로 엮은 한 권의 책이 1998년 발간된《수길․귀무덤․400년(秀吉․耳塚․四百年), 김홍규 편저, 일본 웅산각 , 1998(사진)》이다.
▲ 코영수증(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목 대신 코 264개를 받았다고 써 있다. |
책 제목이 “耳塚” 곧 귀무덤으로 표기되어 있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 책에는 누키이(關井正之)씨를 비롯한 일본인 3명과 박용철 씨를 비롯한 3명의 한국인이 각각 임진왜란과 풍신수길 그리고 <코무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코무덤>을 다룬 한일 학자들의 핵심 주제는, “코를 벤 이유와 묻힌 코가 몇 개냐?”였다.
▲ 임진왜란 400년 학술회의를 정리한 책 <수길·이총·400년>(왼쪽)교토 미미즈카 400년 학술토론회 사진, 아쉽게도 귀무덤이다. |
▲ 1979년 교토시에서 세운 안내판, "耳塚(귀무덤)"으로 표기(위) 2009년 교토시에서 고쳐 세운 안내판, 괄호 안에 "鼻塚"이라고 추가됨(아래)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세워진 "耳塚" 위령비 (오른쪽) |
풍신수길의 코베기는 그의 주군 오다노부나가에게서 배운 솜씨이다. 오다노부나가는 남녀 2,000명을 죽이고 신체에서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신장기(信長記)》에 있다고 나카오교수는 말하고 있다. 풍신수길이 오다노부나가 휘하에 있을 때 이미 코베기를 잘하여 우수한 장수로 뽑힌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기독교박해 때인 1596년엔 26명의 성인(聖人) 순교 때에도 코를 베게 한 사실이 있다.
- 또 토론회에서 금병동 씨는《본산풍전전수안정부자전공각서(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라는 책의 내용을 들어 풍신수길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라고 했다면서 금수보다 못한 일본군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 이날 학술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 코를 묻었으면 코무덤이요, 귀를 묻었으면 귀무덤이다. 이 문제는 잔학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위의 정리된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풍신수길의 의도적 코베기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부르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베어진 코는 조선에서 일본에 어떻게 운반되었을까?
▲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운반하는 수레.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와서 구경했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무성 그림 |
▲ 소금에 절인 코통이 도착하면 풍신수길은 일일이 코 숫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무성 그림 |
한편, 교토시 외 지역인 오카야마의 천비총(千鼻塚)이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를 묻은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재야사학자 조중화 씨는 당시 풍신수길에게로 가야 할 코를 일개 깃대잡이가 수십통이나 빼돌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단언한다.
▲ 천비총이 있다는 오카야마 카가도 역에서(2013.1 필자) |
필자도 오카야마 천비총(현재는 부안 호벌치 전적지로 이장)에 가보았다. 교토와 오카야마 거리도 거리지만 당시 풍신수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교토로 가져오라고 한 명령을 어기고 타 지역으로 코를 빼돌려 묻었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이야기다. 신간선을 타고 다니는 요즈음도 여행 가방하나 끌고 다니기도 어려운데 수십 통의 코통을 부산에서 배에 싣고 오사카로 가서 다시 육로로 수백, 수천리를 걸어 오카야마에 갖다 묻을 수는 없는 것이다.
▲ 교토시 코무덤 전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 부부, 필자, 우에노미야코 시인(2013.7.23) |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무덤에 대한 코냐 귀냐의 논쟁은 막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신수길이 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따져 봐야한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자랑으로 코를 잘라다 묻은 것이다. 따라서 <귀무덤>이란 완화된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본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용인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어찌 실감할 것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