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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교토 코무덤, 이대로 둘 것인가?

풍신수길의 잔학성, 교토 코무덤을 찾아서<2>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1.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의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2.  
  3.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까닭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귀베기로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97년은 풍신수길이 교토에 통한의 “코무덤”을 만든 지 400주년 되는 해였다. 그 400주년을 맞아 교토 코무덤 앞에서는 추도식이 열렸다. 이어서 임진왜란과 코무덤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날의 토론회를 일본어판으로 엮은 한 권의 책이 1998년 발간된《수길․귀무덤․400년(秀吉․耳塚․四百年), 김홍규 편저, 일본 웅산각 , 1998(사진)》이다.

 
   

                 ▲ 코영수증(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목 대신 코 264개를 받았다고 써 있다.   


책 제목이 “耳塚” 곧 귀무덤으로 표기되어 있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 책에는 누키이(關井正之)씨를 비롯한 일본인 3명과 박용철 씨를 비롯한 3명의 한국인이 각각 임진왜란과 풍신수길 그리고 <코무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코무덤>을 다룬 한일 학자들의 핵심 주제는, “코를 벤 이유와 묻힌 코가 몇 개냐?”였다.

   
토론회에서 연구자들의 주장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다음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1) 풍신수길이 “코베기 명령”을 내린 것은 정유재란 때이며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은 이 유는 후세에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2) 코를 묻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잔혹을 빌미로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귀무덤>으로 바꿔 부르자 한데서부터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불렀다.
   
   
▲ 임진왜란 400년 학술회의를 정리한 책 <수길·이총·400년>(왼쪽)교토 미미즈카 400년 학술토론회 사진, 아쉽게도 귀무덤이다.


대관절 교토 코무덤 속의 코숫자는 몇개냐?
 
그러나 이 학술토론회 이전에도 메이지 시대에 이미 도쿄대학 호시노 박사가 그의 논문에서 ‘교토 코무덤은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이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나카오히로시 교수 역시 <코무덤>의 결정적인 1급 사료인 깃가와가 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 문서(鍋島家文書)에서 <코영수증>은 있어도 <귀영수증>은 없다며 <코무덤>임을 단정하고 있다.
 
또 결정적인 증거는 교토시에서 세운 <코무덤> 안내판이다. 교토시 <코무덤>안내판에는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너무 잔학하다.”라며 완곡한 표현인 <귀무덤>으로 하자 해서 이때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그 유래를 분명히 적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라잔의 주장 이전에는 “코무덤”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야시라잔의 말을 따라 이후 “耳塚” 곧 “귀무덤”으로 써놓았던 것을 교토시가 코무덤의 왜곡을 인정한 것인지 2013년 7월 23일 현재는 귀무덤(코무덤)으로 바꿔놓았다. 곧 “코무덤”을 추가해 넣은 것이다.  
           
   

▲ 1979년 교토시에서 세운 안내판, "耳塚(귀무덤)"으로 표기(위) 2009년 교토시에서 고쳐 세운 안내판, 괄호 안에 "鼻塚"이라고 추가됨(아래)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세워진 "耳塚" 위령비 (오른쪽)



 풍신수길의 코베기는 그의 주군 오다노부나가에게서 배운 솜씨이다. 오다노부나가는 남녀 2,000명을 죽이고 신체에서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신장기(信長記)》에 있다고 나카오교수는 말하고 있다. 풍신수길이 오다노부나가 휘하에 있을 때 이미 코베기를 잘하여 우수한 장수로 뽑힌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기독교박해 때인 1596년엔 26명의 성인(聖人) 순교 때에도 코를 베게 한 사실이 있다.  


  1. 또 토론회에서 금병동 씨는《본산풍전전수안정부자전공각서(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라는 책의 내용을 들어 풍신수길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라고 했다면서 금수보다 못한 일본군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1. 이날 학술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2.  코를 묻었으면 코무덤이요, 귀를 묻었으면 귀무덤이다. 이 문제는 잔학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위의 정리된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풍신수길의 의도적 코베기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부르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베어진 코는 조선에서 일본에 어떻게 운반되었을까?


베어진 코는 일단 배편으로 나고야까지 보내졌고 나고야에서는 오사카까지 다시 배편으로 그리고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길가에는 개선장군처럼 큰 수레에 싣고 지나가는 조선인의 베어진 코를 보려고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다고 《朝鮮倭寇史》를 들어 금병동 씨는 전하고 있다. 
 
   
▲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운반하는 수레.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와서 구경했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무성 그림
 
 
자, 그러면 또 하나의 쟁점인 베어진 코의 수에 대한 견해를 보자.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 나카오히로시 교수는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코무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코베기 기간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로 보고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조중화 씨의 “코베기가 정유재란 때의 만행”이라는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토시 코무덤에 묻혀진 코 숫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르다.
 
   
 
왜 이렇게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코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후세에 기록하는 사람들의 부풀리기 내지는 착오 등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군감끼리 한반도 전선 허위보고를 놓고 벌어진 고소고발사건(우스기시사, 臼杵市史)에 가짜 코 영수증이 나돌았던 적이 있다.  
 
   
▲ 소금에 절인 코통이 도착하면 풍신수길은 일일이 코 숫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한국화가 이무성 그림
 
이러한 사정을 미뤄볼 때 교토 코무덤에 묻힌 정확한 코 숫자는 앞으로도 그 수치를 밝히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한편, 교토시 외 지역인 오카야마의 천비총(千鼻塚)이 임진왜란 때 조선인의 코를 묻은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재야사학자 조중화 씨는 당시 풍신수길에게로 가야 할 코를 일개 깃대잡이가 수십통이나 빼돌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단언한다.

 
   
                        ▲  천비총이 있다는 오카야마 카가도 역에서(2013.1 필자)

필자도 오카야마 천비총(현재는 부안 호벌치 전적지로 이장)에 가보았다. 교토와 오카야마 거리도 거리지만  당시 풍신수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교토로 가져오라고 한 명령을 어기고 타 지역으로 코를 빼돌려 묻었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이야기다. 신간선을 타고 다니는 요즈음도 여행 가방하나 끌고 다니기도 어려운데 수십 통의 코통을 부산에서 배에 싣고 오사카로 가서 다시 육로로 수백, 수천리를 걸어 오카야마에 갖다 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오카야마 코무덤은 일개 깃대잡이 로코스케라는 인물이 만든 것이라는 말만 있을 뿐 교토 코무덤처럼 정확한 사료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 오카야마 천비총에 묻혔다는 조선인 코무덤은 현재 전북 부안군 상서면 유정자재에 있는 호벌치 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귀환했다고 해서 찾아 가보았다.
 
 이곳을 관리하는 민충사(愍忠祠) 곽동식 원장에 따르면 “전 문화원장이 박삼중 스님과 손을 잡고 코무덤의 흙을 모셔와 묻은 곳이 전적비 옆 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참한 일본의 무덤을 이곳으로 무작정 가져와 그 의미가 크게 상실되었다며 뒷말이 좀 있습니다.” 라는 증언을 했다.
 
말하자면 오카야마에 있다던 ‘천비총’은 임진왜란 때 희생자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것으로 외로운 영혼을 모셔온다는 취지에서 흙 한 줌 파다가 호벌치 쪽 사정도 듣지 않고는 가져다 돌무덤만 만든 채로 방치해놓은 것이다.
 
여기서 혼동하면 안 될 것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잘라간 코를 묻은 곳은 교토의 코무덤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교토 코무덤은 풍신수길의 코베기명령과 코영수증이 있고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코무덤이 존재하고 있으며 교토시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이야기를 해야하니 비극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어떻게 생겨 먹은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으로 되었지 코를 베어 소금에 수십 통씩 절여 날라다가 이동네 저 동네 묻었다고 하는 것일까? 더욱 참담한 것은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묻었다’는 궤변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누구나 죽어서 고국 땅에 묻히기를 바라는 게 정상이다. 억지 춘향 식으로 신체의 일부를 떼어다가 ‘위로’ 하고 ‘공양’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은 입이 있다고 함부로 놀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학자들의 주장대로 베어진 코 숫자도 중요하지만 근거 없이 부풀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숫자도 중요하지만 <코무덤>에 묻힌 것이 과연 <귀>냐 <코>냐의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교토 코무덤에는 코만 묻혀있을 뿐 귀는 없다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 교토시 코무덤 전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 부부, 필자, 우에노미야코 시인(2013.7.23)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무덤에 대한 코냐 귀냐의 논쟁은 막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신수길이 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따져 봐야한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자랑으로 코를 잘라다 묻은 것이다. 따라서 <귀무덤>이란 완화된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본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용인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통한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끝난 지 400년이 넘었다. 그리고 1997년엔 400주년 추도식과 학술토론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인 <코무덤>에 대해서는 아직도 왜곡투성이인 채 한 술 더 떠 우리 스스로 역사 기록에도 없는 <이총,귀무덤>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계속 쓰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하랴!
 
 
교토시는 “코무덤”, 사천시는 “耳塚” 통탄할 일이여!
  
분명히 우리는 보았다. 일본 교토 코무덤 앞에 세워진 교토시의 설명판에 “귀무덤(코무덤)”이라고 쓰인 것을 말이다. 일본 안에서의 경과를 보면 “코무덤 ⇒ 귀무덤 ⇒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바뀌어온 것이다.
 
하지만, 한국엔 아직 코무덤이 없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64돌 전후 언론은 여전히 짜기라도 한양 모두 귀무덤이라고 했다. 일본의 완전한 역사 왜곡에 눈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역사 왜곡 현장을 가보도록 하자.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는 한자로 “耳塚”이라 쓴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죽은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의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코끼리만 하다면 그 옆에 별로 시선을 끌지 못할 작은 크기의 “耳塚”이 있고 그 앞 표지판에는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 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군청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표지판이란 그 기념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만일 이 기념비가 한일 간의 문제인 경우에는 일본의 시각이 아닌 우리 조선인의 정신과 철학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우선 이 표지판의 왜곡부분을 보자.
 
1. 풍신수길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랐다.
→ 풍신수길은 분명히 코만 베라 명했다
2.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이라 칭했다.
→ 초기 코무덤 조성 당시부터 “비총(코무덤)”이었으며 ‘귀무덤(이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3. 귀무덤이냐 코무덤이냐는 <잔학성>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한데도 귀든 코든 무슨 문제 냐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표지판의 시각은 현재 한국인이 갖는 <한일간의 역사인식 부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표지판을 보면 이 글을 왜, 누구를 위해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혹시 일본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것은 아닌지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사천시 "이총" 안내판은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역사의 현장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어찌 실감할 것이던가!


 왜곡된 “귀무덤” 비석에 대해 사천시문화원 원장에게 전화로 질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도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며 사천문화원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전화를 끊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코무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짧다. 가해자인 일본에는 수십 편의 논문과 책을 발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의 코무덤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는데. 국내 학자 중에는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유일하게 코무덤의 일부를 다룬 책≪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코무덤>을 다루고는 있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교토시의 코무덤이 아니라 일개 깃대잡이 병사가 베어진 코를 빼돌려 조성했다는 오카야마 코무덤을 다루고 있다. 그는 교토시 무덤을 아쉽게도 “귀무덤”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금 교토 풍신수길 사당 앞에 만든 코무덤 봉분위에는 무지막지한 돌비석이 눌려져 있다.
그 속에서 조선인의 외로운 영혼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분명히 귀가 아닌 코를 잘리고도 귀로 둔갑하여 한 번 더 억울한 원혼이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흙 일부를 모셔와 안치하고 비를 세운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살풀이춤을 춘들 통한의 원혼이 모두 용서하고 편안히 잠들을 수 있을 것인가?
 
왜곡된 코무덤을 밝히려고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발로 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의 지은이 고 조중화 씨의 부인 하선자 씨는 아직도 “귀무덤”인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편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정유재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겨레는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 왜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에 전쟁준비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은 죄. 그 죄 탓에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전쟁의 참혹사를 말해주는 코무덤!
 
 과거의 굴절 되고 왜곡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바로잡지 않은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다.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400년 아니라 4천 년이 흘렀더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오늘 이후 우리 입에서 더는 ‘귀무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분명히 ‘코무덤’인 것이다.
 
7월의 따가운 태양 아래 아무런 그늘 막도 없이 누워 잠든 외로운 조선인들의 코무덤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회원들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 다음 <3회>에서는 오카야마 천비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