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
우습고도 분통하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단 말인가
우습고도 분통하다
부모를 떠나고 나라를 떠났단 말인가
금옥 같은 우리민족이
저들의 노예 된단 말인가
용봉(龍鳳)같은 당당한 사대부가
저들에게 압제를 받는단 말인가 -김대락 ‘분통가’ 중에서-
▲ 김대락 독립투사 어록 |
▲ 어록 전시장 |
*김대락 선생은 누구인가?
'분통가'를 지은 백하 김대락은 1845년 안동부 임하면 천전리에서 도사(都事)를 지낸 우파 김진린(愚坡 金鎭鱗)1)과 함양 박씨 사이에서 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요, 자는 중언(中彦)이며 호는 비서(賁西)라 하였는데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아래 산다는 듯으로 백하(白下)라 하였고 더러는 둔옹(遯翁)이라고도 하였다.
그 당시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으로 삼천석댁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경과가 좋은 집안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그는 두 아우 김효락 (1849~1904), 김소락(1851~1929)과 함께 족형이자 회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의 거유(巨儒) 중의 한 분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에게 배웠다.
백하는 당대에 있어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 석주 이상룡(石注 李相龍)과 함께 서산의 문하생으로서 손꼽히는 학자였다. 구한말인 당시의 국내 정세는 몹시 어려운 때였다.
1895년 의병 봉기,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7년 정미 7조약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고 사법권마저 빼앗기게 된다.
이에 백하는 일제의 침략을 막지 못한 우리 국력의 무력함을 통감하면서 비장한 각오로 국력 신장에 앞장서기로 마음을 정한다.
1907년 천전리 마을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할 때 처음에는 향중의 원로와 함께 신교육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매부인 이상룡이 신문화를 수용하여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설립을 추진할 때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를 읽고부터 생각이 크게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후 이상룡과 함께 협동학교 운영에 앞장을 서 안동 향중의 개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교장을 맡았던 종손 만원 김병식(晩嶢 金秉植)과 함께 문중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백하는 50여간의 자택을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케 하고 자신은 이웃 협실로 거처를 옮길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뒤에 가산서당(可山書堂)을 수리하여 그 곳으로 옮겼는데 이 협동학교는 안동 향내 보수 유림의 개화운동에 요람이었고 애국지사를 길러낸 산실로도 평가받게 된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백하는 신민회(新民會) 계획에 따라 서간도 망명을 결단한다. 그 해 음력 12월 24일 66세의 늙은 몸으로 대소가 남녀 30여 식구를 대동하고 고향을 떠나 이듬해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정착하게 된다.
거기서 1911년 5월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912년에는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하였고 1913년에는 다시 삼원포로 돌아와 정착당시인 1911년 6월에 건립한 경학사(耕學社)를 해체하고 지역 자치기구인 공리회(共理會)를 결성 그 회장을 맡았다.
이렇듯 백하는 서간도 망명후 줄곧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향년 70세로 별세하여 망명지인 삼원포 남산(藍山)에 묻혔다가 1992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가 남긴 유문으로는 『백하일기』 3책과 '권유문(勸諭文)''분통가''공리회 취지서(共理會 趣旨書)''독 대한협회서 유감(讀 大韓協會書 有感)''대동역사서(大東歷史序)'와 많은 시문(詩文)이 있는데 '日記'에 부록되어 있거나 아들 김형식(金衡植)의 『선고유고(先考遺稿)』 에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백하의 유덕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