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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내의 세종한글 길라잡이

최만리, 훈민정음은 세종 단독작품이야

최만리의 언문 창제 반대상소(3)

[그린경제/얼레빗=홍사내 기자]  1. 무릇 일의 공로를 세울 때는 쉽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나라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에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올바른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이 꼭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꿀 만한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후경(先甲後庚; 일의 앞뒤 차례를 잘 살핌)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 황제와 임금)에 묻고 따져 바르게 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년이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구하지도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10여 사람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가져다 붙이고 장인(匠人) 수십 사람을 모아 나무판에 새겨 떠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뒷날 여론이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농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위하여 따르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날에 비교하면 108, 9는 줄어들었고, 임금께 올리는 공무(公務)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었는데, 언문 같은 것은 나라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시간을 맞출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소에서 급히 하시어 몸을 보살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들은 그 옳음을 더욱 알지 못하겠나이다.

[,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 최만리는,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어 반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졸속으로 이루어졌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신하들과 의논하지도 않아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작은 손재주로 만든 것이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또 중요하지도 않고,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서둘러 결정하여 앞으로 그 폐단이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동안 세종이 새 글자를 만들 때 학자들이나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아서, 언제부터 어떠한 준비 과정을 통하여 얼마만큼 연구하여 만들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낸 말로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전의 과정을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나이 47세이던 세종 25(1443) 4월에 세자에게 섭정을 시켰으며 신하들의 반대에도 세종 27(1445) 5월에는 대리청정을 시키고 정사에서 물러나 건강을 위해 애쓰며 새 글자 창제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세종이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지고 여러 가지 병을 얻어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던 때로서 죽기 전에 반드시 새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세종이 얼마나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새 글자 창제 사업이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무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결국 25년을 통치하면서 나라의 무궁함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많은 일을 했던 세종에게, 새 글자 창제란 삶의 마지막 사업이며 백성을 위한 매우 중차대한 사업으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신하들과 학자들에게 새로운 글자를 만들 것을 알리고 논의를 거치면서 좀 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없었고, 임금 독단으로 큰일을 벌이었다는 데 최만리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장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종이 이 사업을 신하들과 학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히 추진하였던 것은 왜일까? 아마도, 매우 전문적인 문자와 음운에 대한 것과, 만물의 이치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주장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시급한 정사에 소홀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을 것이다.  

신하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처음부터 무용론을 펼쳤을 것이며, 이에 휘말려 시작도 할 수 없음을 염려했을 것이다. 예컨대, 현대 사회에서 첨단 기술 연구 기관에서처럼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하는 일과, 입법사법행정과 같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하들과 문자 창제의 일을 논의하는 것은 많은 무리수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글자를 만드는 전문적인 학문 분야도 없었고, 석학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에, 왕조 시대의 임금보다 더 백성을 위해 뜻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임금 옆에서 정사를 돌보는 직책도 함께 지닌 것처럼 당시의 학자는 정치와 구분되지 못하고 겸임하기 쉬웠다. 이런 왕조시대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글자 창제의 일을 학자에게 시키기엔 너무 정치적으로 흔들리기 쉽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세종의 학구적인 노력(문치주의)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나라의 자존을 지키려는 주체정신이 한문(한자)으로 말글살이에 힘들어하는 백성을 보고 그냥 눈을 감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배우기 쉽고 우리말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글자만 있다면 어떤 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였다. 곧 학문도, 임금의 명령도, 법과 제도도, 교육도, 백성들 사이 의사소통도 모두 가능하다면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여겼을 것이다. 

   
▲ 충녕대군 시절 자선당(資善堂)에서 사부(師傅) 이수(李隨) 등의 지도를 받으면서 독서와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이다. 세종은 이렇게 독서광이었기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1. 옛 선비가 이르기를, ‘여러 가지 완호(玩好, 진귀한 노리갯감)는 대개 지기(志氣, 의지와 기개)를 빼앗는다. 편지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 왕세자)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유학(儒學)에 마음을 깊이 두시어 그 이르지 못한 것을 더욱 탐구해야 할 때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별히 문인(文人)의 여섯 가지 해야 할 과목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때를 맞추어 해야 할 민감한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들이 모두 시를 짓거나 묵화를 그리는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신(侍從臣, 이그을 모시던 관직)으로서 죄를 짓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를 감히 묵묵부답으로 있을 수 없어서 삼가 간곡한 마음을 다하여 아룀에, 우러러 성총을 번거롭게 하였나이다.”

[,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罄肺腑, 仰瀆聖聰.] 

- 옛 선비의 말이란, 소학(小學)외편에 나오는 중국 북송 때 사람 정호(程顥)의 말이다. “명도(明道) 정호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자제 중에 경솔하지만 재주가 뛰어난 자가 염려된다면 단지 경서를 소리 내어 읽도록 가르칠 뿐 글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 자제들이 온갖 잡스런 것들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모두 학문에 대한 뜻을 빼앗게 만든다. 그 중에 글씨를 익히고 편지를 쓰는 것은 선비들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이것들마저 지나치게 집착하면 또한 저절로 본뜻을 잃게 된다.”라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학문한다고 할 때 성현의 말씀을 읽어 그 뜻을 깨치는 것을 중요시한 반면, 글쓰기, 창작, 편지쓰기 따위는 부속적인 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전통에 따라 글자를 만드는 일은 임금이나 성인에게 무익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라 종교적 자세이다. 유학에만 집중하여 그것을 따르는 일을 중시한 것이다.

  - 최만리는, 왕세자에게 학문할 시간까지 뺏으면서 언문 창제에 관여케 하는 것은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하지 않다고 하면서, 글자 개발은 선비들이 기예를 부리는 기초적 교양이지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세종이 언문 창제에 왕세자(문종)가 많은 시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세자로서 유학에 더욱 몰두해야 할 시간에 아버지를 도와 언문 만드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최만리 등 여러 신하들은 이미 임금이 새 글자 창제를 위해 준비하고 연구하는 것을 보았고 또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니, 임금이 글을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임금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또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글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다.’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기 싫어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매사냥을 하는 기예도 아닌데 <육예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고 한>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직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기랴? 너희들이 시종신으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薜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固當參決, 況諺文乎? 若使世子常在東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 최만리 등의 상소를 보고 난 뒤 그들을 불러서, 세종은 간단하게 상소 내용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두가 한자음과 다른 우리말을 표현했듯이, 언문도 한자음과 다르지만 이두는 좋다 하고 언문은 그르다 하니 잘못이다. 이두의 음과 글자를 합하는 법이 한자와 다른데 언문만을 문제 삼는 것은 잘못이다.

글자를 만든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도 설총과 세종이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백성을 다스리는 데 번거롭고 학문하는 데 소홀해질 것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글자를 만드는 데는 운서를 배워야 하는데 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이니 신하들의 주장은 잘못이다.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는 신하들이 글자의 음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면 임금인 나는 그동안 중국의 사성 칠음과 자모에 대해 수없이 연구하고 비교 검토하였다. 병이 들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 시간에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인데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일 뿐이다라는 말은 잘못이다. 자모에 대한 연구는 중국 위진 남북조시대부터 있어온 것이고 세종은 오랫동안 중국의 운서를 탐독해 왔다. 그러므로 옛것을 싫어한다는 말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한낱 기예에 불과하다는 말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동국과 함께 상의한 것은 국가의 직무를 세자가 처리함과 같이 새 글자 창제의 일도 국가의 중요한 일이니 당연한 일이다.

시종신으로서 그동안 임금의 뜻을 보아왔음에도 함부로 말한 것은 옳지 않다. 

하니, 최만리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바꾼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글자의 기세를 보고 이 말을 한 것이옵고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만드는 것은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일이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선비이다.”  

하였다. 이는 지난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정창손이 이렇게 아뢰었기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글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직제학 신석조·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부교리 하위지·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시키고, 곧바로 의금부에 지시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바꾸어 아뢴 까닭을 국문(鞫問)하여 아뢰라.”하였다. 

[萬理等對曰: “薜聰吏讀, 雖曰異音, 然依音依釋, 語助文字, 元不相離. 今此諺文, 合諸字而竝書, 變其音釋而非字形也. 且新奇一藝云者, 特因文勢而爲此辭耳, 非有意而然也. 東宮於公事則雖細事不可不參決, 若於不急之事, 何竟日致慮乎?” 上曰: “前此金汶啓曰: ‘制作諺文, 未爲不可.’ 今反以爲不可. 又鄭昌孫曰: ‘頒布三綱行實之後, 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 人之行不行, 只在人之資質如何耳, 何必以諺文譯之, 而後人皆效之?’ 此等之言, 豈儒者識理之言乎? 甚無用之俗儒也.” 前此, 上敎昌孫曰: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諸民間, 則愚夫愚婦, 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昌孫乃以此啓達, 故今有是敎. 上又敎曰: “予召汝等, 初非罪之也, 但問疏內一二語耳. 汝等不顧事理, 變辭以對, 汝等之罪, 難以脫矣.” 遂下副提學崔萬理直提學辛碩祖直殿金汶應敎鄭昌孫副校理河緯地副修撰宋處儉著作郞趙瑾于義禁府. 翌日, 命釋之, 唯罷昌孫職. 仍傳旨義禁府: 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 其鞫以聞.] 

- 세종은 상소에 대해 매우 너그러운 조치를 취하여 신하로서 의견을 제시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로서 말을 바꾼 것만을 죄주었을 뿐, 논쟁에 대한 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신하들의 생각이 형편없음을 답답해하는 세종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 글은 세종이 언문 창제 작업을 시작한 시기는 과연 언제부터일까?”로 이어진다.

홍현보.2013.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