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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의각스님은 오사카 백제사에서 뭘 했나?

백제사라 이름 붙은 일본 절의 현주소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방안에 앉아서도  심안(心眼)이 열려 세상을 훤히 내다 보았던 스님!  폭넓은 지식으로 민중 교화에 힘썼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위대한 스님으로 알려진  백제스님 의각 선사가 주석했던 백제사는 오사카시 텐노지 도오가시바에 있던 (大阪市 天王寺 堂ヶ芝町)절로 지금은 조동종의 말사인 관음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스님 의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 문헌은 9세기에 쓰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이다. 이 책 ‘상권 14’에는 의각스님에 관한 진기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의각스님은 원래 백제국 스님으로 죠메이왕(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 때에 일본에 건너와서 나니와(難波京)의 백제사에 살았다. 의각법사는 키가 7척(210미터)으로 불교에 널리 통달했으며 항상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때에 혜의(慧義)라 불리는 스님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나와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흘깃 의각스님 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방에서 신기한 광채가 새어나왔다. 혜의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손가락으로 뚫고 들여다보았다. 법사가 단정히 앉아서 경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광채가 입에서 나고 있었다. 혜의 스님은 놀라서 다음날 아침 절 안의 승려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의각법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젯밤 반야심경을 백번 외웠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떠보니 방안의 사방 벽이 모두 툭 터져 집 밖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너무 이상하여 절 밖으로 나갔다가 정원에 들어서서 보니 좀 전에 툭터져 보였던 방의 벽이 원래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원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니 또 전과 같이 방의 벽들이 훤히 터져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시 반야심경의 영험인 것이다.”


   

▲ 오사카 도오가시바에 있던 백제사 (현, 관음사)


 이 설화를 보는 시각은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백제스님 의각이 보통 인물이 아닌 존재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2미터가 넘는 키도 그렇거니와 입에서 광채가 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의각스님이 오사카 백제사에 주석하고 있을 무렵 일본 조정의 왕은 죠메이왕으로 그는 여왕이었다. 죠메이왕은 재위 5년째인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일본에 인질로 와 있던 백제왕 풍장(豊璋)을 백제로 보내고 이어서 일본 내 백제유민들과 힘을 모아 백제부흥에 앞장섰던 왕이다.


 죠메이왕은 직접 나니와(難波)에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들에게 무기와 신라를 침공할 배를 만들게 했으며 자신은 치쿠시(지금의 후쿠오카)로 직접 건너가 신라원정군을 지휘하는데 천황의 몸으로 손수 군사를 진두지휘한 예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여왕이 백제 부흥을 위해 뛰고 있던 시각에 의각스님은 백제사 주지를 맡았으므로 무엇인가 멸망한 조국의 부흥을 위해 했음 직하지만 그 저간의 상황은 설화집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죠메이왕과 의각스님이 활약하던 시대(600년대)와 《일본영이기》가 만들어진 시간(800년대)이 무려 200여년이 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더구나 불교설화집인 까닭에 이 책을 쓴 저자가 정치적인 사항보다는 승려로써 뛰어난 점만을 기술한 관계로 당시 의각스님의 활동사항을 좀 더 상세히 이해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평범성을 초월한 모습으로 백제스님이 그려졌다는 것은 주목해볼 일이다.


 이를 두고 다무라엔쵸 박사는 “방에서도 밖의 일을 훤히 꿰뚫었다는 것은 산림수행승만이 가능한 일로 당시 법기산사(法器山寺)에 있던 백제승려 다라상(多羅常)이 산속에서 수련을 거듭한 끝에 영험을 터득한 스님이 된 것처럼 의각스님 또한 일본 불교가 산림수행불교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으로 《한일고대불교관계사》에서 밝히고 있다.


   

▲ 셋츠명소도회<摂津名所図会>는 관정8년(寛政8年~10年)에(1796~98)간행된 셋츠국(현재의 오사카) 관광안내서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음사 자리에는 백제사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여기서 기왕에 백제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일본 내에 산재한 백제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백제사는 시가현(滋賀県)에 있는 백제사(일본 발음은 햐쿠사이지)로 이곳은 16세기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상의 천국’으로 극찬할 만큼 단풍으로 유명하여 일명 백채사(百彩寺)라고 불리는 곳이다.


또 한 곳은 나라시(奈良市)의 백제대사(百済大寺)를 들 수 있는데 현재는 대안사(大安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은 성덕태자가 세운 남도7대사의 하나로 일본불교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던 절이다. 또 한 곳은 오사카시의 히라가타(枚方市)에 있던 백제사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감은사의 가람배치와 유사한 형태의 절로 창건당시에는 대규모였으며 지금은 오사카에서 유일한 특별지정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역사적인 곳이다.

 

절이름

일본발음

소재지

비고

백제대사(현, 대안사)

햐쿠사이지

奈良県 奈良市 大安寺2丁目18-1 (나라현)

 

명칭 바뀜

백제사

구다라지

滋賀県 東近江市 百済寺町323 (시가현)

현존

백제사터

구다라지

大阪府 枚方市 枚方市 交野ヶ原 (오사카부)

절터만 남음

백제사(현, 관음사)

구다라지

大阪市 天王寺 堂ヶ芝町 (오사카시)

명칭바뀜

백제사

구다라지

奈良県北葛城郡広陵町大字百済1168(나라현)

현존

 

의각스님에 대한  한국쪽  기록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에 있는 향천사에 있다. 향천사 기록에는 “656년(백제 의자왕 16)에 의각(義覺)이 금오산 향로봉 아래에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멸운에 의해 중건되었다. 극락전, 나한전, 천불전과 더불어 많은 요사채를 갖추고 있으나, 오랜 세월 잦은 보수와 증축으로 사찰의 원형이 많이 사라졌다(후략)”


 이 기록대로라면 의각스님은 백제에서 향천사와 대련사를 완성하고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의각스님이 일본에 건너 간 기록은 <일본영이기>에 “의각스님은 원래 백제국 스님으로 죠메이왕(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 때에 일본에 건너와서 나니와(難波京)의 백제사에 살았다”고 했으니 죠메이왕이 재위연도인 655년에는 일본에 건너갔다고 보아야한다.


 다만 충남 향천사에 전해오는 의각 스님이야기가 9세기에 만들어진 일본설화집인 <일본영이기>에 영향을 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향후 더 조사하여 관련성을 확인 해봐야 할 것이다.


 신통력을 바탕으로 민중교화에 앞장섰던 백제출신 의각 스님이 주석하던 절은 지금 남아있지 않고 그 자리에는 이름을 달리하는 절(현재는 관음사로 바뀜)과 신사가  들어서 있지만 승려로서 뛰어난 모습은 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일본의 설화집에 고스란히 남아 후세의 우리들에게 당시의 발자취를 쫓아보고 싶은 충동감을 불러 일으켜 주고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조촐한  경내를 걸으며 백제 스님 의각선사를 떠 올려 보던 시간이 다시 그립다. 


★찾아 가는 길

 *주소: 大阪市 天王寺 堂ヶ芝町 (현, 관음사로 바뀌어 있음)
 *가는 길: 제이알오사카칸죠센(JR大阪環状線)을 타고 모모다니에키(桃谷駅)에서 내리면 3분 거리이다.